배우는 즐거움에 대한 확신
2001년 8월30일
배우는 즐거움에 대한 확신
평생학습은 평생부담이라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무얼 배우고 나면 뭐가 모자란듯하여 또 다시 눈을 돌려 배우고.어느 선에서 정돈되지 않는 향학열이 어쩌면 일종의 욕구불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해서입니다.요즈음 신문하단 광고에 적지 않은 부분이 대학들의 평생교육원 또는 사회교육원 교육생 모집 광고입니다.우선 드는 생각은 대학이 한 때는 대학원생 모집으로 돈을 벌더니 이제는 평생교육원생 모집으로 돈을 벌고 있구나,하는 것입니다.
대학뿐 아니라 각종의 사회교육기관들이 여성들을 향해 손짓하고 있습니다.교육과정의 목차를 보면 군침 도는 제목들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습니다.뭐라도 하나 배워놓으면 좋을 듯 싶은 것에서부터 여건이 되면 꼭 배워야지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취업의 가능성을 엿보이게 하는 과목,취미생활을 향상시키는 과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0여년전 대도시 중심의 언론기관과 백화점 문화센터가 시작했던 프로그램들이 이제는 전국 곳곳에서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배울 수 있는 체제가 갖추어졌습니다.소위 평생학습 기반시설이 잘 갖추어진 셈입니다.그런데 문제는 정말로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작년 제 마음에 담겨있는 불만 가운데 하나는 왜 이렇게 사람들이 휩쓸려 다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시간마다 돌고 도는 백화점 셔틀버스에 무심히 올라타고 있는 사람들을 아파트 창밖으로 보면서 회의적이었습니다.
1993년도에 여성의 문화활동에 관한 조사를 하면서 보았던 긍정적인 부분들,부정적인 부분들이 지금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만 막연한 느낌은 어쩌면 여성들이 문화소비자로 전락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아야 돈은 들지만 가족이 서로 편해지는 것처럼 여성들도 그렇게 수강비 내며 문화센터로 내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이러한 회의적인 생각으로 정중동(靜中動)의 생활을 스스로 강조하면서 일체 외부로부터의 학습을 무시하고자 하였고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도 있습니다.
작년에 교장직에서 퇴직하신 선생님을 만나 뵈었더니 저에게 메모장을 보여주십니다.교직에 계시는 동안 은퇴한 후 배우고 싶은 것들을 틈틈이 메모한 것입니다.문화센터가 제공하는 모든 항목들 가운데20여 가지는 될 듯 싶습니다. 40여년간 교직에 몸담고 있는 동안 참으로 많이 가르치기도 배우기도 하셨으련만 직업을 위한 배움이 아닌 자신이 정말 배우고 싶은 것은 이러이러했다고 하십니다.당장 하고 싶은 것은 너무 많으나 차근차근 하나씩 다져나가며 배우겠다고 하십니다.뎃상을 배우고 있는데 얼마 전 바나나 하나를 그리다보니 날이 밝아오더라 하시며 내심 즐거워하는 표정이십니다.
선이 구체화되어 모양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무수히 지우고 긋고 하면서 자신과 씨름하며 얻었을 아직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해냈다는 충족감과 즐거움을 그 선생님으로부터 보았습니다.저 역시 지난3개월 동안 문화유산 공부에 푹 빠져 보면서 과연 학습,배움의 즐거움은 어디서 비롯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 자신이 막연하나마 찾던 것에 대한 동의,지적 영역을 넓혀가는 것 같은 충족감,알게 된 만큼 보이게 된 새로운 시선들,그리고 이들 모두를 합산하여도 모자랄 것이 없는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의기투합이었습니다.그것은 세상을 다시 얻은 것 같은 힘(영어로 쓰면 요즘 유행하는empowerment)일 수 있겠다,라고 정리해보았습니다.
이제 다시 각종 교육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합니다.스스로 느껴보았던 그 힘을 어떤 프로그램들에서 어떤 사람들이 느끼며 이 세상을 작지만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피부로 느껴지는 물가(物價)처럼 문화가(文化價)도 그렇게 느껴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