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통신

마틴루터킹 기념휴일

이춘아 2019. 8. 6. 19:44


미국통신18 - Martin Luther King Jr. 기념휴일

January 19, 2000

 


117일은 미국 공휴일 가운데 특정의 개인을 기념하기로는 유일한 휴일이었습니다. 흑인인권운동가로 알려진 마틴 루터 킹 2세 목사의 탄신기념 휴일이었습니다. 킹 목사의 생일은 115일입니다만 올해는 주말휴일인 토요일과 겹쳐 월요일로 넘겨 공휴일로 정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여행을 하면서 인상적인 것은 어느 마을에 가든, 어느 도시에 가든 Martin Luther King Jr.라는 도로가 늘 있었다는 점입니다. 어떤 곳은 Dr.까지 붙인 긴 이름의 도로명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름에 Jr.(Junior)를 붙이는 것조차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 Dr. Martin Luther King Jr.라는 full name으로 미국이 기억하고자 하는 그는 과연 누구인가요.

 

(그의 아버지도 마틴 루터 킹 목사이었기에 우리가 아는 킹 목사는 반드시 킹 2세라고 붙여야 하나 여기서는 그냥 킹 목사로 서술하고자 합니다) 킹 목사와 나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에와서야 기억을 더듬어 정리해 보면 아마도 1978년 봄이었지 싶습니다. 신문단신을 보고 찾아간 곳이 서울 덕수궁 옆 성공회 건물이었던 같은데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서거 10주년 기념식이었습니다. 1978년 당시의 암울했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막연히 알고있던 킹 목사 기념식은 나를 끌어들이게 한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것은 두 가지. 하나는 그 행사를 주관했던 문동환 목사님(문익환 목사님의 동생이자 영화배우 문성근씨의 작은 아버지이신)이 내 나고 그렇게 잘 생긴 사람은 처음 봤다는 기억이고, 또 하나는 구속중이었던 김영일(김지하) 선생의 부인이 노래를 부르셨는데 거기 너 있었는가라는 찬송가입니다. 흑인영가이기도한 그 찬송가의 가사는 그후 나의 양심의 반향으로 자리하게 됐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20여년이 지난 오늘 킹 목사가 살아 활동했던 장소를 순례하는 것으로 그와 나와의 만남이 다시 이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킹 목사가 태어나 공부하고(조지아 주 아틀란타 시) 목회활동과 인권운동을 하고(알라바마 주 몽고메리 시) 암살 당하기(테네시 주 멤피스 시) 까지의 행적을 간직하고 있는 지역을 다녀왔습니다.

 

킹 목사는 1929115일 침례교 목사인 아버지와 음악가인 어머니 사이에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National Historic Site로 지정된 아틀란타의 흑인마을에서 대학까지 다녔고 27세에 보스톤 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기까지는 우수한 흑인엘리트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킹 목사로서의 숙명적인 운명으로 연결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알라바마 몽고메리에서 목회를 하면서부터 입니다. 그가 몽고메리로 왔던 1954년은 Rosa Parks라는 흑인여자가 버스에서 하차거부로 구속되었던 해였습니다.

 

1957년 인도를 방문한 킹 목사는 간디의 비폭력 가르침을 민권운동의 방침으로 세우고 흑인운동 단체들과 연대하여 활동하게 됩니다. 1960년에는 비도덕적 법률에 저항하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벌이다 구속되는데 이 사건은 당시 대통령 선거의 주요쟁점으로 번지게 되어 그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케네디와 닉슨 가운데 케네디만 그 쟁점에 관심을 가졌는데 큰 표 차없이 케네디가 당선되었지요. 그 후 킹 목사의 집과 교회에 폭탄이 터지고 인권운동가들이 살해되고 킹 목사 역시 몇차례 구속되는 상황이 이어지다가 미국 전역의 흑인운동단체들이 연대하게 되는 워싱턴 행진이 1963년 도모됩니다. 이 행사에서 킹 목사의 연설 “I Have a Dream" 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25만 여명의 군중들을 환호하게 한 유명한 연설로 전해져 옵니다.

 

그 해 12<타임> 지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이 되고 다음 해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며, 1965년에는 셀마에서 몽고메리로의 행진, 드디어 1965년에 투표권 법안이 법률로 시행됩니다. 그 후 그의 비폭력저항 운동은 계속되었으나 성과가 적어 그의 운동전략이 비난받게 되고 1967년 베트남 전쟁 반대 입장을 표명하여 모두를 놀라게 합니다. 그같은 입장이 인권운동의 대변인으로 그의 위치가 절하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전쟁을 반대하지 않는 것 또한 그의 운동의 방향을 모호하게 하는 것임을 확신한 처사였습니다.

 

더 나은 조건을 개선하려는 민권운동에 대한 그의 지원은 계속되어 19684월 청소부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멤피스를 방문하였다가 그가 묵었던 모텔에서 피살됩니다. 그 날이 44일입니다. 그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며칠 동안 폭동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지난 115일 토요일, 멤피스의 국립시민권박물관(The National Civil Rights Museum)을 찾아갔습니다. 킹 목사가 피살당했던 Lorraine Motel을 개조하여 박물관으로 만들었더군요. 시민권이라 표현됐지만 흑인시민권 쟁취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그 박물관에 몽고메리에서 로사 팍스가 하차거부를 했던 50년대의 버스가 보존되어 있고 그 당시 버스운전사가 하차하라고 명하던 목소리가 녹음기로 되풀이되어 재연되고 있었습니다. 관람객들은 그 버스에 타 볼 수 있어 당시 상황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당시 정황을 전시물을 통해 느낍니다. 화장실도 백인종과 유색인종이 구별되던 그 당시 버스에는 흑인은 뒷자리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고 백인이 앉을 자리가 없으면 흑인이 당연히 자리를 비켜주어야 하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어찌 된 일인지 로사 팍스는 좌석에 앉아 백인이 서 있어도 모른 채 하고 앉아있다가 운전사가 하차하라고 명해도 일어나지 않고 결국에는 구속당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킹 목사는 흑인인권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준수한 외모에 억압받는 자들을 대변해 줄 수 있는 호소력있는 목소리로 금방 흑인운동 지도자의 반열에 서게 됩니다. 196382825만 여명이 운집한 워싱톤 행진에서 그가 한 “I Have a Dream" 연설 테이프는 들어 보았습니다. 그 날의 울림이 전해집니다.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조지아의 레드힐에서 노예의 아들과 그 노예의 주인의 아들이 오직 형제애로서 한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그 날이 오리라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어린 아들들이 피부색으로서가 아닌 개성으로 판단받는 그 나라에 언젠가 살게 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것이 내가 남부에 살아야할 신념입니다. 이러한 신념이야말로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을 쪼아 낼 수 있습니다. ...“


흑인교회 목사님 설교시 교인들이 옳지, 그렇지등의 추임새가 따르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킹 목사의 그 날의 연설에서도 마찬가지로 청중들은 낮은 감동에는 추임새로 높은 감동에는 환성과 박수로 화답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 우리에게도 그 날의 함성이 있었는데... 민주화와 민권화와 더불어 그 날의 함성은 사라지고 이제 21세기를 맞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그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킹 목사와 말콤 엑스를 20여년간 연구해온 밴더빌트 대학의 루이스 볼드윈 교수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희생적인 지도자였고 인류공동체의 이념을 실현하는데 자신의 삶을 던진 사람이었다. 오늘날 그들을 이을만한 지도자가 없다. ... 당신이 자본주의 체제의 재건설에 대해 말하고자 하려면, 자본주의를 악()으로 정의하고자 하려면, 개선(reform)이라는 아이디어에서 혁명(revolution)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생각해야 한다.” 경제적 생존의 틈바구니 속에서 혁명이라는 단어조차 가물가물해진 오늘날 모처럼 과격한 발언을 하는 사람을 봅니다.

 

또다른 자료를 보면 킹 목사의 동료였던 윌리암 멕클레인은 한 기념식에서 킹 목사의 이름을 붙인 도로만 만들 것이 아니라, 그 도로를 사람이 걸을 수 있고 놀 수 있고 살 수 있는 안전한 장소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그의 뜻을 이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작년 연말 킹 목사의 생가가 있고 그의 묘비가 있는 아틀란타의 국립역사보존지역을 찾아갔다가 바로 10분 거리에 있는 카터 대통령 박물관에 들렸습니다. 세련되고 우아한 건축물인 그 박물관을 찾아온 방문객들은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백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전 킹 목사의 유적지를 찾아온 방문객은 거의 흑인들이었습니다. 자동차로 10분인 지척간에 이방인인 황인종의 머리에 이렇게 선명하게 흑백을 구별짓게 하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요. 차별은 사라지고 있으나 구별은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