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연재
<여성문화>300년 전 여성의 삶...엄한 가운데 파격
2003.5.20
이춘아
2001년 여름, 송촌동에 있는 ‘송용억 가옥’에 답사를 갔을 때 그곳이 예사롭지 않은 곳이라 여겼다. 그곳은 여성사와 관련된 문화유적지로 특화하여도 될 것 같았다.
송용억 가옥에는 대전이 자랑하는 조선중기의 여성시인 호연재 김씨의 시집과 서간문 뿐 아니라 송씨 문중 부녀자들의 살림살이 백과사전이라할 수 있는 <주식시의(酒食是儀)> 등의 책이 전해져오고 있다. 300년 내력을 지닌 그 집에서 호연재 김씨가 쓴 시들이 후손에 의해 시집으로 묶여져 읽어왔고 100여년 전에는 <주식시의>라는 제목으로 책을 엮어 집안 대대로 내림해오던 살림비법을 전수해 옴으로써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이 문자로 기록되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후 내가 가졌던 궁금증은 이제나 저제나 책으로 묶어서 낸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닌만큼 어떻게 해서 부녀자들의 글을 모아 책으로 만들어내려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얼마전 허경진 교수의 <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이란 책이 발간되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의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시,문을 중시 여겼던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삶의 많은 부분이 일상을 기록하고 그것을 묶어 대대로 보관해왔던 것은 거의 습관과도 같았다는 점이다. 흔히 우리민족은 기록을 등한시한다고 하나 전쟁 등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 적어서 확인되지 않았을 뿐이지 생활을 꼼꼼히 기록해 왔음을 이 책을 통해 알수 있었다. 집안 어른들의 머리맡에 늘 두고 보았던 책력 한켠은 그 날 일어났던 일을 적는 일기책이기도 하여 간직해두었던 몇십권의 책력을 정리하면 일기문이 된다.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동춘당일기>가 대표적인 예이다.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증손자인 소대헌 송요화와 1699년 결혼하여 이곳 회덕으로 시집온 호연재 김씨는 지금의 법동에서 한동안 살다가 현재 ‘송용억 가옥’이라 불리는 터로 이사와 자리잡았으니 300여년이 흐른 것인데, 이 집이 오늘날 의미가 있는 것은 집안 유품으로 발간된 각종 책자와 생활용품들을 선비박물관을 사재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으며, 90세가 넘으신 송용억옹과 10대후손인 송봉기 선비박물관장과 관장의 부인이며 대전시 무형문화재 9호로 지정된 윤자덕 여사가 거처하고 계신다. 소나무 순으로 빚은 술인 대전 민속주 ‘송순주(松荀酒)’를 만드는 무형문화재이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궁금증은 남녀가 유별하고 삼종지도 등으로 꼼짝없이 조신하게 살았을 양반댁 마나님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것이다. 종갓집, 대갓집 마나님들은 우아하게만은 살 수 없었던 것이 호연재 김씨의경우만 해도 남편인 소대헌은 출타중일 때가 많아 집에 없는 때가 많았고, 노비만도 30여명이 되었다고 하니 실제로 관리자로서 통솔력이 가장 컸을 것으로 보인다. 호연하다는 말이 있듯이 호연재는 그의 호만큼이 대담하고 호연했으며 요즘말로 대찬 여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연재의 시는 아주 감성적이지만 ‘스스로 경계하는 글’이라는 뜻을 지닌 <자경편(自警篇)>을 보면 인간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는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서문에 부모, 남편, 자식, 종들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이 글을 지었다고 밝히고 있어 부모, 남편, 자식이외에 종과의 관계도 아주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호연재의 경우 시부모을 직접 모시지 않았기에 부부관계를 더 중시하였고 실제로도 호연재는 삼강(三綱)가운데 부부가 으뜸이라고 했다. 부부가 있은 뒤에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을 뒤에 군신이 있다는 것이 호연재의 생각이었다.
수십마지기 논밭에 농사를 지어 살림이 넉넉하기도 했지만 흉년이 들거나 애경사가 많은 해에는 곡식이 부족해 벼슬하는 오라버니나 시아주버니에게 시(詩)로 또는 편지를 보내어 곡식을 빌리기도 했다. 호연재 25세때 제천현감으로 있던 시아주버니에게 인사와 안부를 전한후 지난번에 편지와 함께 보내준 생선을 반찬으로 잘 먹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장 담을 콩을 서너말만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또 술과 담배를 즐기기도 했다. 송순주의 양조비법이 오늘날 대전무형문화재로 지정될 정도의 집안이었던지 호연재 역시 술을 가끔 즐겼다. “취하고 나니 천지가 넓고 마음을 여니 만사가 그만일세. 고요히 자리에 누웠노라니 즐겁기만 해 잠시 정을 잊었네”라고 ‘취작(醉作)’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었다. ‘남초(南草)’라는 시에서는 “연기피우니 신기한 맛이 온갖 염려를 사라지게 해 인간세상 시름에 막힌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이 약을 가져다 걱정스런 창자를 풀리라”라고 하였다. 사대부 집안의 근엄한 종부였던 호연재가 그 당시 남쪽나라에서 수입되었다고 하여 남초라고 불리웠던 담배를 피워 근심걱정을 달랬음을 알 수 있다.
호연재의 시와 글이 책으로 묶여나오게 된 것은 사대부집안의 가풍이 선대의 글 모으기 뿐 아니라 필사본이라 하여 한문을 한글로 또는 한글을 한문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였다. ‘대대로’ 물려주고자 하는 정신이 있었기 가능한 일이다. 호연재 집안이 300년동안 모아온 책에는 부녀자들이 지켜야할 <자경편> 같은 글 뿐아니라, 200수가 넘는 <호연재유고> 같은 시를 호연재의 증손자며느리인 청송 심씨가 68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에게 읽히기 위해 필사하여 표지에 ‘증조고시고’라고 붙였다. 이 집안의 내력이라 할 수 있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필사자의 발문이 이렇게 쓰여있다.
갑술년 5월 12일 고령 관에서 시작하여 6월 5일에 필사를 마치다. 본초를 베껴두고 책없어 수십여 년을 경영하다가 비로소 정사하나 내 나이 예순여덟이라, 글씨 늙고 눈 어두운데 붓이 없어 짓모았으니 해괴하나 적심으로 공들여 이뤘으니, 남 빌려 상케 말지어라.
호연재 집안의 여성들이 대대로 읽기 위해 필사된 책들이 많이 남아있다. 7책으로 나누어진 <유효공전>, 17책으로 만들어진 <유씨삼대록>이 200년넘게 전해져왔고, 상 하권으로 필사된 <수매청심록>은 1920년대에 필사된 것으로 보아 책을 베껴서 읽기를 즐긴 문학적 관습은 20세기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소설을 다른 집에서 빌려다 직접 필사했을 뿐 아니라 혼인할 때 혼수용품으로도 고소설을 가져갔다. 때로는 시집간 딸이 친정에 오면 친정부모들이 딸을 위해 필사해두었던 것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필사는 집안의 영광스런 작업이기도 하였는지 시어머니와 큰며느리 작은며느리가 공동으로 필사하고는 시어머니의 소원을 풀어주었다라고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필사자들이 남긴 공통의 내용이 밤늦게까지 등불 밑에서 필사하느라 힘들었으니 자손들이 이 책을 깊이깊이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말고 대대로 전하길 당부하는 것이었다. 분절된 정보만 있는 이 시대에 대대손손 이어지는 문학적 정보유산이 참으로 끈끈하게 느껴져 새삼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