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온 우주와 연결되었다는 위안

이춘아 2024. 7. 26. 23:16

이명현 장대익, [과학인생학교], 사이언스북스, 2023. 


(89~ 102쪽)
우주를 생각하면 아련함과 경이로움이 들다가 그 속의 존재인 인간을 생각하면 허무함과 허망함, 그리고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저도 우주와 자연을 생각할 때는 늘 경이로움에 가까운 느낌을 받지만 저 자신에 생각이 미치면 허무함이 몰려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라는 별먼지가 우주의 그 광막한 시공간의 역사를 머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내 숭고함 같은 게 느껴집니다. 나아가 제가 잔가지라는 생각에 이르면 고귀함마저 느낍니다. 제가 고립된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온 우주와 화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도 큰 위안을 줍니다. 

그래도 138억 년의 역사를 가진 우주에서, 또 그토록 광활한 우주에서 고작 100년도 되지 않는 시간을 살아가는 자신이 불쌍해집니다. 이 작디작은 행성인 지구에서 태어나 다른 천체로 가 보지도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힘이 빠지고 절망적인 느낌까지 받기도 하지요. 하지만 저는 과학자로 훈련을 받아 왔고 별먼지와 잔가지라는 자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과학적 맥락을 이해하고 나아가 과학적 태도를 바탕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이로움과 허무함이 같이 몰려오고 미미하고 연약한 존재라는 인식이 경외감을 넘어서서 두려움이 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과학이 많은 진실을 밝혀낸 지금과 달리 여전히 많은 것이 무지의 베일로 가려져 있던 시절에는 어땠을까요? 우리 조상들은 별먼지와 잔가지라는 자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당연히 지금처럼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과학이 더 발전하고 세월이 흐르면 우리 후손들은 진리에 더 가까운 새로운 버전의 별먼지와 잔가지 담론을 가지게 되겠지요. 우리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솔직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과학 역시 한계를 지닌 ‘시대의 학문’일 뿐입니다. 어떤 시대든 사람들은 그 시대가 규정한 한계 내에서 사고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상상력의 끄트머리를 잡고 인식의 한계를 확장하고자 애를 써 왔습니다. 그 역할을 오늘날에는 과학이 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탄생하기 전에는 종교나 철학 같은 것들이 그 역할을 담당했을테고요. 과거의 지적 유산이 현재 관점에서 볼 때 부족한 부분이 있다거나 틀렸다고 하더라도 존중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늘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했던 것이니까요.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은 부부가 함께 쓴 [잊혀진 조상의 그림]에서 인류를 “우주적 천애 고아”로 규정했지요.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왜 여기 존재하는지 모르는 존재. 이게 우리의 처지라니, 아찔하지 않나요? 이러한 처지 때문에 우리는 위안을 갈망하게 됩니다. 

양자 역학과 상대성 이론, 그리고 빅뱅 우주론의 도움으로 우주의 탄생 직후 일어난 일들까지 이해하게 되었고, 진화론 덕분에 인류라는 종의 기원과 다른 생물들과의 관계를 이해하게 된 지금도 광막한 우주와 보잘것없는 인간의 처지라는 간극을 메우지 못하고 허무함과 두려움에 흔들리는데, 과학적 사실로 채워야 하는 지식 세계를 상상과 망상과 거칠고 짧은 삶의 경험으로 채워야 했던 과거에는 두려움이 더 강하게 작동했을 것입니다.  이를 이겨 내고 위안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중략)

요컨대, 과학적 지식은 인간들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자신들의 삶과 우주의 본질에 대해 깊이 있는 인식을 가지게 해 줍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더 넓은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깊이 있는 성찰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보다 다양하고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게 해 줍니다. 

오랜 세월 동안 종교에 맡겨 두었던 위안의 역할을 이제는 과학이 물려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과학은, 단지 종교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미래를 향한 새로운 가치와 세계관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간 시작 부분에서 이야기한 ‘천애 고아’라는 칼 세이건의 규정을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그는 또다른 자신의 대표작 [코스모스]에서 “우리는 종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지구에게 충성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의 버림을 받은, 기댈 곳 없는 ‘천애 고아’가 아닙니다. 함께 진화해온 지구 생명이라는 뿌리 깊은 친척들이 있고 지구라는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할 행성도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다시 우주와 우리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 머릿속의 믿음 엔진이 오작동해  폭주하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말이지요. 

처음 이 지구에 발을 디뎠을 때에는 천애 고아인 줄 알았던 별먼지와 잔가지 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 기대어 가며 다른 어떤 허구적인 존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과학을 지팡이 삼아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아름답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