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정결한 손가락

이춘아 2024. 11. 2. 10:13

방현석, [범도]1, 문학동네, 2023.


(8~13쪽)
안중근이 가지고 온 단총은 38구경 리볼버였다. 미국에 갔던 백무아가 그에게 가져다준 것과 같은 기종이었다. 단총을 들고 사냥에 나서는 멍청한 포수는 없다. 안은 단총을 익히려 온 것이었다.

농장에서 기다리는 인부들을 위해 그들은 국거리가 될 만한 붉은 사슴 한 마리를 먼저 잡기로 했다. 붉은 사슴은 녹각과 사향의 값은 없어도 체장이 크고 육질이 좋아 인부들이 좋아했다.

범도는 일격으로 체장 육 척에 사십 관은 너끈하게 나가는 붉은 사슴을 주저앉혔다. 안중근은 리볼버의 방아쇠를 두 번이나 당겼는데 완전히 빗나갔다. 단총으로 저격할 거리가 아니었다.

범도가 오기 전까지 연해주 최고의 명사수로 꼽힌 안중근답게 단총도 금방 손에 익혔다. 하지만 열 보를 벗어나면 탄환이 표적을 벗어났다.

“이거 장총에 비할 게 못 됩니다.”

열다섯 보 앞에서 여섯 발 중 세 발을 표적에 집어넣은 안은 고개를 저었다. 총신을 꺾어 회전식 약실에 장전을 마친 안중근은 스무보 앞에서 다시 여섯 발을 쏘았다. 표적은 열 보, 열다섯 보에서와 마찬가지로 장정의 상체 형상이다. 표적에 들어간 것은 여섯 발 중 단 한 발이었다. 그는 입맛을 다시는 안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리볼버로 이 정도면 대단한 거요.”

회전식 약실이 총열과 분리된 38구경 리볼버는 격발 순간에 총구가 튀어올라 반동을 제어하기 까다로운 총기였다.

“오소리는 몰라도 범을 잡으려면 리볼버로는 어렵소.”

그는 리볼버를 쥔 오른손 위에 얹힌 안중근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새끼손가락과 길이가 같은 약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옆에 선 최의관의 왼손으로 눈길을 옮겼다. 최의관의 약지도 새끼손가락과 길이가 같았다. 두 사람의 약지는 그들이 동의단지회의 맹원임을 말해주었다. 약지 한 마디씩을 자르고 태극기에 ‘대한독립’ 네 글자를 피로 쓴 동의단지회의 맹약을 그는 알고 있었다. 동의단지회가 정한 제1과업은 대한의 원수인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2대 조선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처단이었다. 그들의 제2과업은 민족반역자 이완용과 박제순, 송병준의 처단이었다.

동의단지회의 맹원들이 왼손 약지를 자른 것은 그 손이 열 손가락 중 가장 쓰임이 적어서가 아니었다. 함부로 사용하지 않아 가장 정결한 손가락이 약지였고, 심장으로 통하는 기혈의 끝이 약지였으니, 그들은 가장 정결한 손가락을 들어 심장에서 뿜어져나온 피로 ‘대한독립’ 네 글자를 쓴 것이었다. 제1과업을 삼 년 안에 이루지 못하면 자결로 동포에게 사격할 것을 태극기에 뿌린 피로 맹세한 그들이었다.

안중근은 자신이 이끌던 부대가 없어졌다고 했지만 아니었다. 리범윤 예하의 의병대에서 안이 지휘하던 부대가 사라졌을 뿐이었다. 십이 인의 단지동맹은 그가 본 어떤 부대보다 강력한 비밀 결사대였다. 안중근과 십일 인의 맹원은 무명지를 자르지 않은 범도에게 그들의 비밀을 공유했다. 그는 비밀을 알았으니 자기도 무명지를 잘라야겠다고 했다. 농 반 진 반으로 한 그의 말을 안중근은 농담으로 받았다.

”충심은 가상하나 대장님은 조직 밖의 조직원으로 남아야겠습니다.“
”내 자격이 모자라오?“
”모자라다니요. 넘쳐서 아니 되지요. 원래 천주는 어부와 세리같이 비천한 자들만 세상에 파송할 사도로 받아들였습니다.“
”포수도 그리 고귀하지는 않소만.“

안은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제가 천주쟁이지 않습니까. 천주께서 산정에 올라 밤새 기도하시고 열두 제자를 불러 하늘의 뜻을 온 세상에 전할 사도가 되라 명하셨습니다. 오늘날 조선과 동양에 내린 하늘의 뜻은 대한 독립이고 동양의 평화고, 우리 열두 맹원은 하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사도이며, 십이는 하늘과 땅을 대표하는 완전수여서 여기에 하나를 더할 수도 뺄 수도 없습니다.“

”내 얼핏 듣기로 열두 제자 중에 배반자도 하나 았다던데?“

그는 자신의 농담이 훗날 뼈아픈 진실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 또한 하늘의 뜻이겠지요.“

”미리 하나를 더 보충해두는 것은 어떻소?

“조직 밖의 조직원 하나는 있어야 우리가 삼 년 안에 뜻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일을 계속하지 않겠습니까.”

안중근이 단총을 꺼내 보이는 순간 그는 안이 기어코 단독 작전에 착수했음을 직감했다. 단총 저격은 근접전이었다. 몸을 빼서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작전이었다. 그런데도 안중근은 태연자약했다. 단총 사격을 익히면서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선비 출신의 천주쟁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배포였다.

“범 사냥이 오래 남았소?”

말하지 않는 것은 묻지 않는 것이 비밀결사의 철칙이기에 그는 이렇게 에둘러 물었다.

“첫눈이 오기 전에는 끝내야지요.”

가을이 가기 전에 실행한다면 리볼버를 익힐 시간으로는 넉넉지 않았다. 아무리 사격술을 타고난 안중근이라고 해도 총기가 신체의 일부처럼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정확한 조준이 가능한 장총이 아닌 단총은 더욱 그랬다.

“그럼 브라우닝을 쓰는 것이 좋겠소.”

“브라우닝이 리볼버와 많이 다릅니까?”

“물론이오.”

총열이 앞뒤로 왕복하며 격발의 충격을 줄여주는 브라우닝과 달리 회전식 약실을 가진 리볼버는 한 손으로 반동을 받아내기 매우 어려웠다. 그는 안의 리볼버를  받아들고 표적을 조준했다.

“가늠쇠의 위에 표적을 올려두고 조준선을 정렬한 다음 이렇게 팔을 앞으로 쭉 뻗으면, 조준선은 작아지는데 표적은 그 크기 그대로 아니오. 조준의 정확도가 그만큼 올라가는 것이오.”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탄환은 표적의 심장에 박혔다. 스무 보 앞이었다. 최의관은 입을 벌렸고 안중근은 콧수염이 말려들도록 입술을 꽉 사리물었다.

“이건 내가 잘 쏘아서가 아니오. 리볼버에 익숙해진 지 한두 해가 아니기에 한 손으로 반동을 받아낸 것일뿐이오. 이 단총을 제 것으로 만드는 데는 세월이 필요하오.”

WFR, WFJ. 백무아가 손잡이 양쪽에 새겨둔 그 서양 글자가 희미해 지도로 그의 손아귀에 머문 단총이 리볼버였다.

“브라우닝은 한두 번만 쏘아보면 한 손으로 얼마든지 반동을 받아낼 수 있고, 조준 속사도 가능하오.”

반동을 어떻게 받아내느야에 따라 승부가 갈리는 것이 단총 사격이었다.

“브라우닝을 구하시오.”

안중근은 그가 돌려주는 리볼버를 받아들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이 페티카를 만나봐야겠군요.“

페티카, 이제는 그의 귀에도 익숙해진 이름이었다.

”페티카를 만나보셨습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저와 같이 가시죠.“

”오늘 당장 말이오?“

”오늘밤에 하면 될 일을 내일로 미룰 게 뭐란 말입니까.“

안중근은 괜히 번개라는 별명을 얻은 게 아니었다.

“저는 브라우닝이 필요하고, 홍대장님은 부하들을 옥에서 꺼내야하지 않습니까. 리범윤 대감 밑으로 들어가기 싫으시면 페티카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