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휴먼 액츠

이춘아 2025. 2. 16. 16:01

장융, [아이링 칭링 메이링](이옥지 옮김), 까치글방, 2021.


(360~ 369쪽 )
1966년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자 칭링은 더 이상 집 밖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일으킨 가장 큰 숙청 사업으로, 주요 표적은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서 국가 주석이 된 류사오치였다. 그가 대약진 이후 돌연 마오쩌둥을 공격하고 마오쩌둥의 초고속 군수 사업화를 중단시킨 것(덕분에 대기근도 끝이 났다)이 원인이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계획을 방해한 류사오치를 증오했고, 그가 감옥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만들었다. 류사오치의 아내 왕광메이는 “미국중앙정보국과 국민당의 간첩”이라는 황당무계한 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혔다. 중국 전역에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류사오치의 추종자로 몰려서 고초를 겪었다. 이들에게는 ‘주자파’ ‘마귀’ 등 기괴하고도 무시무시한 꼬리표가 붙었다. 총리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충실한 종노릇을 해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칭링은 이번에도 쑨원 부인이라는 신분 덕택에 최악을 모면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이 홍위병으로부터 보호할 것을 특별히 명한 인물들의 명단에서 그녀는 첫째 줄에 위치했다. 칭링 역시 곤욕을 치렀지만, 다른 이들이 겪은 것에 비하면 그저 성가신 일에 불과했다. 홍위병들이 상하이에 있는 부모님의 묘를 파헤치자, 칭링은 저우언라이에게 사진을 보내서 이 사실을 알렸고 묘지는 곧 복구되었다. 다만 칭링의 형제자매들의 이름은 묘비에서 긁어 파내진 그대로 남겨졌다. 새로 온 경호실장이 칭링을 괴롭게했지만, 저우언라이의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서 불만을 전달하자 곧 교체되었다(문화 대혁명의 열성적 신봉자였던 새 경호실장은 극적인 방식으로 퇴출당했다. 그가 마오쩌둥 어록을 노래로 만든 “어록가”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사무실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부하 한 명이 다가와서 경례를 하고는 긴급하게 논의드릴 일이 있으니 방으로 가시자고 권했다. 그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문 뒤에서 두 사람이 튀어나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를 붙잡고 허리띠에 꽂혀있던 권총을 빼앗았다. 새 경호실장은 대문 밖으로 인도되었고, 풀이 죽은 채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 떠나갔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모든 사람에게 조금씩은 두려움의 맛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에 따라서 칭링에게는 상하이로 돌아가지 말고 베이징에 머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당국의 허가를 받은 홍위병들이 그녀의 집 밖에 진을 치고서 진홍빛 담장을 향해 확성기로 살기등등한 구호를 부르짖었다. 잔인한 ‘비판투쟁’이 진행될 때면 희생자들이 고통에 차서 절규하는 소리가 칭링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칭링은 등골이 오싹했다. 스탈린의 숙청 사업도, 장제스의 ‘백색테러’도, 마오쩌둥이 주도했던 지난날의 정치 운동들도 이 정도로 끔찍하지는 않았다. 홍위병들이 갑자기 집에 난입하여 예쁜 핸드백, 구두, 옷감을 보고 ‘부르주아적’이라며 자신을 고문할까봐 겁먹은 칭링은 물건들을 전부 화로에 넣어 태워버렸다. 비둘기와 금붕어 따위의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을 비난하는 기사를 읽고서는 즉시 보던 신문을 내려놓고 고용인들에게 자신이 기르던 비둘기들을 전부 죽이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비둘기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 소식을 보고받은 저우언라이가 비둘기들을 그대로 두라고 명했다. 칭링이 자신의 공포를 오랜 친구에게 충동적으로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수신자는 마오쩌둥을 지지하던 미국인 기자 애나 루이즈 스트롱이었다. 그러나 편지를 부치자마자 더욱 큰 공포가 칭링을 덮쳤고, 그녀는 황급히 두 번째 편지를 써서 방금 보낸 편지를 없애달라고 스토롱에게 부탁했다. 스트롱은 칭링을 안심시켰다. “두 번째 편지를 받고 곧장 첫 번째 것을 내 손으로 잘게 찢어 변기애 흘려보냈어요. …… 편지는 일말의 흔적도 남지 않았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끔찍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친구들, 친척들이 비판투쟁에서 가혹하게 심문당했다. 집에 끌려나와서 감옥에 갇혔고, 잔혹한 폭행을 당한 끝에 목숨을 잃었다. 칭링의 절친한 친구이자 문화 대혁명 이전에는 상하이의 부시장이었던 진중화는 ’미국의 간첩‘으로 몰려서 강도높고 무자비한 심문을 당했다. 그의 집도 수색을 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칭링의 편지 80여 통이 발견되었다. 읽고 나서 없애달라는 칭링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진중화가 그녀와의 교제를 소중히 여기고 간직한 것들이었다. 마오쩌둥 정권에 대한 불경한 내용은 조금도 없었지만, 진중화는 편지의 어느 구절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되어 칭링에 화를 입힐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정신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한 그는 1968년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칭링의 거의 모든 친척들이 단지 쑹씨 일가와 관계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진 핍박을 받았다. 외종사촌 지지전은 상하이의 집에서 홍위병들에게 끌려나와서 얻어맞고 짓밟혔다. 입에서 피를 토하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그녀는 칭링에 도움을 호소했다. 1966년 12월 14일자 편지에서 그녀는 자신이 당한 일들을 낱낱이 고했다. “이 모든 고통과 공포를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 살아보려고 노력할 거예요(자살하면 반동분자로 취급된다고 하더군요).” 편지 말미에 서명한 다음 니지전은 이렇게 덧붙였다. “간씨 고모네 며느리는 가스를 마시고 자살했어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벌써 여덟 번째예요.”

칭링은 편지를 받아보았다. 여전히 베이징을 떠나지 말라는 지시에 묶여 있을 때였다. 답장은 쓰지 않았지만, 상하이에 사는 옛 직원에게 집을 잃은 사촌동생 앞으로 돈을 전해달라고 은밀히 부탁했다. “자산 계급 집안에서 태어났을 뿐, 내 사촌동생은 정치에 관여하거나 나쁜 일을 저지른 적이 없었어요. 줄곧 시키는 대로 성실하게 살았지요.” 그러나 그후로 직원은 소식이 없었다. 나중에야 칭링은 그녀가 문화 대혁명 시기에 중국 내의 거의 모든 조직들이 앞다투어 설치했던 임시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칭링의 돈을 전달하려고 했던 것이 원인일지도 몰랐다. 칭링은 사촌동생을 도우려는 시도를 포기해야 했다. 1968년 5월 , 만신창이가 된 니지전은 절박한 심정으로 칭링의 상하이 저택으로 찾아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칭링은 베이징에 있으니 돌아가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문전박대 당한 니지전은 건너편 건물로 향했다. 그리고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

사촌동생의 죽음은 칭링을 괴롭혔다. 칭링은 자신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고, 사촌동생이 등장하는 꿈을 꾸었다. 결국 그녀는 악몽을 견디다 못해서 자신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던 오랜 친구 랴오멍싱에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편지는 사방에서 벌어지는 잔혹 생위를 향한 분노와 혐오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읽고 나면 없애달라는 부탁도 적혀 있지 않았다. 1971년 2월에 쓰인 이 편지는 문화 대혁명에 대한 칭링의 가장 큰 비판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이 지옥 같던 시기에 칭링은 수양딸들도 만나지 못했다. 칭링이 그들의 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해묵은 소문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의심은 그 어느 때보다 구체적이고 공식적이었다. 홍위병들은 칭링이 수쉐팡에게 수많은 선물들을 안겨주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당시로서는 값비싼 사치품이었던 카메라와 더불어 옷 여러 벌을 그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칭링은 어쩔 수 없이 1969년 10월 당국에 서신을 보내서 자신의 오명을 벗겨달라고 부탁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문제의 옷들은 그가 몇 차례 공무상 나를 수행해 외국을 방문했을 때 정부에서 지급받은 것들입니다. 내가 그에게 준 옷은 한 벌도 없습니다. 다만 카메라는 내가 선물한 것이 맞습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당국은 쑨원 부인의 원한을 사서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1970년 초 칭링은 실로 오랜만에 수양딸들을 볼 수 있었다. 10대가 된 아이들이 나타나자 그녀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벅차올랐다. 아이들은 훌쩍 자라 있었다. 수융칭의 키는 이제 칭링보다 컸고 발도 부쩍 자라서 남성용 신발을 신어야 했다. 칭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이들을 향한 사랑을 느꼈다. 이때부터 아이들은 칭링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아이들은 거의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다. 문화 대혁명 시기에 학교 수업이 중지되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면 교사를 비판하거나 홍위병끼리 파벌을 나누어 싸웠고, 이도 저도 아닐 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빈둥거렸다. 1960년대 말 마오쩌둥은 홍위병을 해산하기로 결정하고 그들을 농촌으로 보내서 농민으로 일하게 했다. 절대 다수의 청년들에게는 이러한 상산하향이 유일하게 주어진 길이었다. 칭링은 자신의 ‘딸들’만큼은 절대 그렇게 내버려둘 수 없다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인맥을 동원하여 아이들을 군대에 입대시켰다. 당시로서는 특권층에게만 허락되던 대안이었다. 그리하여 수융칭은 문예공작단에서 발레를 배웠고 수융제는 군병원에서 일했다.

1971년 9월,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문화 대혁명 시기에 마오쩌둥에 버금가는 권력자였던 국방부 장관 린뱌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마오쩌둥과의 관계가 틀어진 후 소련으로 도피하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문화 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을 대신하여 나라를 운영한 것은 린뱌오가 장악한 군대였다. 더 이상 군대를 믿을 수 없게 된 마오쩌둥은 자신이 몰아낸 옛 관료들을 다시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는 문화 대혁명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던 전임 부총리 덩샤오핑도 포함되었다. 분위기는 확연히 누그러졌다. 고위층 사이에서는 문화 대혁명을 가리켜 중국의 ‘홀로코스트’라고 일컫는 이들도 생겼다. 이러한 새바람 속에서 칭링은 보다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도 괜찮겠다고 느꼈다. 1972년 6월 신임하는 친구이자 친척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말했다. “어제 저녁 당신과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절말 즐거웠습니다. 혁명이 불순분자들을 표면 위로 드러내는 건 분명합니다만, 얼마나 많은아까운 생명들이희생되었는지요! 그많던유능한 간부들이요!” 그녀가 직접 친 밑줄은 그녀가 느낀 감정의 강렬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후 수년에 걸쳐 칭링의 수많은 친구들이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들 중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5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오랜 친구 이스라엘 엡스타인 부부도 있었다. 엡스타인 부부의 석방 소식이 전해지자 칭링은 감격했지만, 일말의 두려움은 여전했다. 칭링은 그들을 수감되기 전처럼 대해도 무방하냐고 당국에 넌지시 문의했다.

칭링은 다시 파티를 열기 시작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친구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웃음을 터뜨렸다. 파티가 있는 날이면 칭링은 정성스럽게 화장을 했다. 얇게 파우더를 발랐고, 미술용 붓으로 눈썹을 그렸다. 그녀를 분노하게 만드는 일은 여전히 많았다. 가까운 친구를 만찬에 초청했는데 누군가의 방해로 그가 참석하지 못한 일도 있었다(칭링은 그가 아파서 오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친구는 반대로 칭링이 아파서 만날 수 없다고 통보받았다). 화가 난 칭링은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랫동안 당에 충성을 바쳐온 당원을 이렇게 푸대접하는 법이 어디 있답니까! 가사 도우미를 구하는 데에도 애를 먹었다. 공안부가 지원자들의 출신 성분을 까다롭게 따졌기 때문이다. 자격 심사를 통과하여 칭링에게 배정된 가사 도우미가 전족 때문에 거의 걷지 못하는 할머니였던 적도 있었다. 칭링은 기분이 언짢았다. ”그들은 그이의 출신 성분이 좋다고 하지만, 왜 후손들이 조상의 죄에 구애받아야 하냐는 말이야!“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일흔일곱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다. 칭링은 애통했다. 생이 몇 개월 남지 않았을 때에도 그는 최선을 다해 그녀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거들어주었다. 한 남자가 수융칭이 돈을 빌려놓고 갚지 않았다며 그녀를 구타하는 일이 생기자, 칭링은 즉시 펜을 들어 당국에 그를 고발했다. 이를 전해들은 저우언라이는 남자를 일주일간 구금하고 사과문을 쓰게 했다. 칭링이 넘어져서 다쳤을 때에는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서 그녀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같은 해 9월 9일,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다. 상하이에 머무르고 있던 칭링은 베이징에서 걸려온 장거리 전화로 소식을 접했다. 여든세 살 칭링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 소식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그즈음 누군가가 그녀에게 오는 편지를 가로채 도착을 막는 듯하다는 의심에 정신이 쏠려 있었던 같다.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한 달 후, 그의 말년에 가장 가까운 심복이었던 ’사인방‘이 체포되었다.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을 비롯한 이들 사인방은 문화 대혁명 시기에 일어난 모든 악행의 원흉으로 지목되었다. 칭링은 비로소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칭링은 문화 대혁명이라면 치를 떨었지만 마오쩌둥을 탓하기는 꺼렸다. 그에게 책임을 묻게 되면 그녀 자신이 내린 결정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평생 그릇된 길을 걸어왔으며 구원자를 잘못 선택했다는 결론에 이를지도 몰랐다. 칭링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는 선택을 했고, 거기에 후회는 없다.“ 칭링이 원래부터 싫어했던 장칭의 몰락은 편리한 변명거리가 되어주었다. 칭링은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사실 그 어떤 정책도 장칭이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마오 주석의 개였습니다. 그가 누구를 물라고 명령하면 가서 물었죠.” 장칭은 1930년대에 상하이에서 배우로 활동하다가 몇몇 좌파 예술가들과 함께 옌안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마오쩌둥의 눈에 들었다. 1938년 마오쩌둥은 (세 번째) 아내를 버리고 장칭과 결혼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오쩌둥은 장칭이 악의에 가득 찬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꺼이 그 악의를 이용했다. “장칭은 전갈보다도 독이 가득한 사람이라네.” 마오쩌둥은 집안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며 새끼손가락을 전갈의 꼬리 모양으로 까딱까딱 움직였다. 장칭은 마오쩌둥의 명에 따라서 문화 대혁명을 진두지휘했고, 남들이 꺼리는 일을 도맡았다. 그녀가 모두에게 미움받고 있음을 마오쩌둥도 알았다 불치병을 앓던 말년의 그는 쿠데타가 일어날까 두려워하며 정적들을 향해 거듭 메시지를 보냈다. ‘내 아내와 그 패거리는 당신들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다. 단, 내가 죽을 때까지는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장칭과 사인방이 수감되자 칭링은 기뻤다. 그녀는 흥분하여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은 이 요사스러운 여자에게 지나치게 인정을 베풀었어! 글쎄 그 여자가 날씨가 너무 춥다면서 가발을 되돌려달라고 요청했다지 뭐니!“ 사인방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던 1980년, 칭링은 안나 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장칭이 저지른 최악의 악행은 모든 일이 남편 마오쩌둥의 지시였다고 주장하여 그의 명예를 더럽힌 것이라고 말했다. ”정신 나간 여자 같은니라고!“ 마오쩌둥의 부주석인 칭링은 소리쳤다. 칭링은 사적인 편지에서도 다시 마오쩌둥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운 좋게 만나볼 수 있었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어요. 그의 명석한 사상과 가르침을 우리는 충직하게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거듭되는 승리의 길로 이끌 거예요.“ 뻔한 찬사 뒤로 칭링은 뒤늦게 떠오른 생각을 소괄호 안에 이렇게 적었다. ”(한 가지 의문이 있어요. [장칭과의] 관계를 단번에 끊으면 그녀가 소란을 일으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칭링은 진심으로 중국의 ‘홀로코스트’가 이 밉상인 여자의 단독 소행이었다고 생각한 듯하다.

새로운 시대가 막을 올렸다.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으면서 중국은 바깥 세상에 문을 열고 개혁개방의 시대로 들어섰다. 개혁개방은 중국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덩샤오핑은 공산당과 마오쩌둥의 권위를 부정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칭링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한 결정이었다.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그녀는 ”아주 여유로웠고“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