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중국 역사의 모자이크 일부 복원

이춘아 2025. 2. 23. 13:50

조너선 카우프만,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최파일 옮김), 생각의힘, 2023.


(35~ 41 쪽)

중국 공산당 판본의 역사에는 적잖은 진실이 담겨 있다. 하지만 다른 진실들도 존재한다. 상하이는 중국의 용광로, 중국을 형성한 모든 세력들 - 자본주의, 공산주의, 제국주의, 외국인, 민족주의-이 한데 모인 도가니였다. 1895년에 이르자 상하이는 현대적인 런던의 설비에 버금가는 시가 전차 체계와 가스 공급망을 보유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타이판 빅터 서순의 주도로 시카고에 버금가는 마천루와 스카이라인을 갖추게 되었다. 

상하이는 당시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다. 나머지 세계가 대공황에 빠져들고 있을 때 장제스 정부는 화폐를 안정시키고 수출 붐을 일으키기 위해 서순과 협력했다. 상하이는 중국의 뉴욕, 금융과 상업, 산업의 수도가 되었다. 또한 중국의 로스앤젤레스, 즉 대중문화의 수도도 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상하이 소재 출판사들은 1만 종이 넘는 소책자, 신문, 잡지를 펴낸다. 그곳의 영화사는 수백 편의 영화를 찍어 냈고 그중 다수는 서구화된 도시를 배경으로 햇다. 대학들이 융성했다. 정치도 마찬가지였다. 상하이 국제 조계(개항 도시의 외국인 거주지로 외국이 행정권과 경찰권을 행사했다 -옮긴이)는 기업 공화국처럼 운영되었다. 

서순가 대표들을 비롯해 기업가들로 구성된 7인 위원회가 중국 법률과 독립적으로 도시를 운영했다. 역설적이게도 그 덕분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정치 환경, 다시 말해 언론 자유와 공산주의 및 시위를 탄압하는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중국인 활동가와 개혁가, 급진주의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훗날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되는 단체는 이곳 상하이, 서순가와 커두리가의 본사 건물과 고급 저택에서 고작 몇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첫 모임을 열었다. 

서순가와 커두리가는 자신들을 억만장자로 만든 도시, 그리고 한 세대의 중국인 비즈니스맨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그들이 자본가와 기업가로서 성공하는 것을 가능케 한 도시를 빚어내는데 기여했다. 그들은 기업가 정신이 충만한 문화를 창출했지만 1949년 중국 공산당은 그 문화를 싹 지워 버렸다. 빅터 서순 덕분에 상하이는 중국을 세계 엘리트들에게 열어젖힌 ‘그랜드 투어’의 한 행선지가 되었다. 그가 주최한 가면무도회와 그의 캐세이 호텔 무도회장에는 노엘 카워드, 찰리 채플린, 미국 사교계 인사 윌리스 심슨이 나타나곤 했는데, 심슨은 몇 년 뒤에 어느 국왕이 왕위를 포기하게끔 할 정도의 성적인 기교들을 상하이에서 배웠다고 전해진다(영국의 왕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한 후 심슨과 결혼했다 - 옮긴이).

광란의 1920년대 그리고 1930년대에 중간계급과 부유층 중국인들은 상하이가 제공하는 경제적 기회와 중국의 다른 곳에서는 누릴 수 없는 삶의 가능성에 이끌려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으리으리한 백화점, 호텔, 나이트클럽, 카지노가 그들에게 손짓했다. 영국인, 미국인, 프랑스인과 여타 외국인들과 맞닥드려 수십 년간 정체와 퇴보를 겪은 뒤, 많은 중국인들은 상하이가 새롭고 역동적인 중국 문화를 빚어내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상하이는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20세기를 끌어안을 준비가 된 도시로 보였다. 서순가와 커두리가는 세계를 중국에 개방하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중국을 세계에 개방하는 것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추축 세력의 일원으로 독일에 합류했을 때 서순가와 커두리가는 힘을 합쳐 제2차 세계대전의 기적 가운데 하나를 이뤄냈다. 1만 8천명의 유럽 유대인들이 나치를 피해 베를린과 빈에서 8천킬로미터 떨어진 상하이로 흘러 들어오자 빅터 서순은 비밀리에 일본군과 교섭을 벌였다. 나치 인사들이 일본 점령군에게 유대인 피난민들을 바지선에 태워 황푸강 한복판에 수장시켜 버리라고 채근하고 있을 때였다. 서순가와 커두리가는 유럽과 팔레스타인, 심지어 미국 내 유대인도 할 수 없던 일을 해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지에 발을 들인 유대인 난민을 한 명도 빠짐없이 보호했다. 그 가운데는 수천 명의 어린이들, 나중에 커서 미국 재무장관이 되는 마이클 블루멘설, 미술가가 되는 피터 맥스, 할리우드 영화사의 임원이 되는 마이클 메다보이, 하버드 법학대학원의 교수가 되는 로런스 트라이브도 있었다. 

공산당이 상하이를 함락하고 커두리가와 서순가 소유의 호텔과 대저택, 공장을 몰수하자 커두리가는 중국 남단의 영국 식민지 홍콩으로 물러갔다. 서순가는 런던과 바하마제도, 심지어 텍사스주 댈러스까지 도망쳤다. 하지만 그들은 상하이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서순가와 커두리가 모두 사업, 특히 개명된 사업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그들은 정부가 손을 뻗지 않으려한, 아니 뻗을 수 없었던 영역으로 갔다. 그들의 결정은 수억 명의 삶을 변화시켰다. 서순가는 나머지 세계가 불황에 빠져들고 있던 1930년대에 중국 경제를 안정화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그들은 중국인 한 세대를 세계 자본주의 안에서 육성하며 오늘날 중국의 놀라운 성공을 위한 길을 닦았다. 커두리가는 수백만 홍콩 주민에게 전기를 공급하며 수백 년 동안 삶의 속도가 바뀌지 않던 지역들을 변모시켰다. 1949년 이후, 공산주의를 피해 도망쳐 온 상하이 출신 중국인 공장주들과 손을 잡기로 한 커두리 가문의 결정은 세계 시장을 열어젖히고, 홍콩의 성장을 촉진하고, 21세기에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만든 수출 붐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예리한 정치적 경제적 감각에도 불구하고 서순가와 커두리가는 자신들의 사무실과 사치스러운 응접실 바로 바깥에서 무르익고 있던 공산주의 혁명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1949년 그들의 생각과 달리 공산당이 승리했을 때 서순가와 커두리가는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그들은 오늘날까지 중국의 대미관계와 여타 대외관계에 오늘날까지 그림자를 드리우는 유산을 남기고 떠났다. 오늘날 중국 박물관 방문이나 관광 혹은 비즈니스 미팅이나 외교 교섭 자리는 모두 중국에서 외세의 착취와 제국주의의 역사, 중국이 겪은 굴욕, 그리고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결의로 끝난다. 아편 무역에 대한 공부부터 상하이 와이탄의 극적인 스카이라인과 홍콩의 미래를 둘러싼 갈등에 이르기까지 이 가문들이 남긴 유산은 오늘날 중국이 내리는 거의 모든 결정에 무겁게 걸려 있다. 

이 책의 목표 중 하나는 중국 역사의 모자이크 일부를 복원하는 것이다. 

중국이 학생과 방문객, 기업을 해외로 보내며 많은 이들이 중국의 세기라고 여기는 시대를 열어나가고 있지만 중국 지도자들은 역사의 복잡다단함을 회피한다. 그들은 중국을 역사의 피해자로, 심지어 중국이 흥기하고 있을 때 조차도 피해자로 그리길 좋아한다. 중국이 가난하고 허약하고 고립된 채로 남았다면 상하이 그리고 서순가와 커두리가의 이야기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이야깃거리,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는 일종의 대체 역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이 직면한 문제들 -외국인들과 함께 일하기, 불평등과 부패, 세계 속에서 중국의 위상 찾기, 민족주의와 개방성 사이의 균형, 민주주의와 정치적 통제, 다양성과 변화-은 상하이를 만들어왔고, 커두리가와 서순가가 매일같이 직면했던 문제들이다. 커두리가와 서순가만큼 상하이도, 그곳의 성장과 발전, 투쟁과 모순도 이 책의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