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조각들을 꿰메다

북한기독교역사사전 편찬위원회, [북한기독교역사사전 2],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25.
(1769쪽)
이계실 李桂實 1890.1.17-1971.4.9
장로교 목사.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출생했다. 1913년 신구약전서를 홀로 연구하다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1916년 1월 세례받았다.
1919년 북주동•궁본• 흥남교회 조사로 시무했으며, 1922년 3월 함흥성경학원 졸업, 함흥 남부•북주동교회 조사로 시무했다. 1931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 졸업, 함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북주동 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했다. 1938년 덕천•동덕천• 기곡• 상수리• 장흥 등 5개 교회에서 담임하던 중 9월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결의되자 노회를 탈퇴해 교인들과 함흥경찰서에 구금되었다.
해방 후 자신이 담임하던 5개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을 지도하던 중, 1950년 12월 수백 명의 교인을 인솔해 거제도로 피난했다. 1951년 12월 덕천교회를 설립하고 1953년 3월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했다. 부산으로 피난온 평안도 계통의 재건파 교회와 연합하여 대한예수교재건교회로 활동하다.
1955년 2년 만에 결별했으며, 1955년 10월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으로 교회와 신학교를 이전하고 1967년 덕천교회를 동천교회로 개칭했다. 1969년 대한예수교순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하고 노회장에 추대되었으며, 순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활동했다. 1971년 별세했다.
[참고문헌] 「기독신보」1933.10.18; 『함남노회 5회 회록』 (1921); 『조선총 독부관보』 1919.7.15; 『목사대설교집」 (장로회총회종교교육부, 1935); 『이계실 목사, 그의 삶과 신학』 (지태일, 레노바레, 2015) 『한국교회박해사』 (최훈, 예수교문서선교회, 1979): 『기독교대백과사전』 12권; 동천교회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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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작업을 한 [북한기독교역사사전]이 2025년 12월에 발간되었다.
제일 먼저 찾아본 부분이 이계실목사님에 대한 내용이었다.
어릴 때 우리집에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분이 이계실 목사님이었다. 조각 조각의 기억을 맞추어보면, 우리 부모님이 이계실 목사님과 함께 사셨다고 했다. 추측해보건데 거제도 피란시절부터였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부산으로 이주해온 이후에도. 부모님의 첫아이였던 오빠는 거제도 피란지에서 태어났다. 목사님 부부와 함께 살았던듯 하다. 신식교육으로 무장된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할머니는 소위 미국식 육아를 원하셨고 육아권이 엄마에게 없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자녀가 없었는데 오빠를 친손주처럼 직접 키우셨다고 했다. 어찌된 연유인지 우리 친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니였는데 그 댁에서 함께 살았다.
부산서 살 때 아버지가 대학을 다시 다녀야해서 엄마가 생계를 책임져야했고, 내가 3~4살 때 서울로 이사갔다. 할아버지 할머니댁에 머물면서 엄마는 남대문인지 동대문인지에서 포목상을 하셨다. 이때도 오빠와 나를 할머니가 돌보셨던듯 하다. 오빠는 목사님 할아버지 손주라는 이유로 동네아이들이 감히 건드리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미국가셨을 때 사오셨다는 가죽잠바를 오빠는 입었다. 망원경도 있었는데 내가 망원경을 목에 메고 있다가 어떤 아저씨가 잠깐 보자고 해서 주었더니 들고 가버려 한동안 소동이 나기도 했다. 할아버지 목사님은 함흥서 피란 올 때 교인들을 배에 태워 내려올 정도여서 교인들과 친밀도가 높았던듯 했다. 영등포 신길동 부근이었것 같은데 교회를 중심으로 교인들이 집을 짓고 살았고 담을 두르고 있어서 교인들 영역과 세상사람들과 분리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영역을 구분하는 담이라는 실체가 내 기억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동네가 높았던지 담 너머 아래 동네를 보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분홍색 플라스틱 인형을 내게 선물로 보내주셨다. 분홍색 인형을 손에 들고 망원경을 목에 걸고 다녔던 기억. 망원경을 잃어버려 한차례 소동이 났었다.
남녀차별에 대한 인식이 내게 자리잡은 건 그 당시였던 것 같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오빠를 애기 때부터 키우셔서인지 오빠 중심으로 대해주셨다. 해서인지 나는 조용한 편이었고, 오빠는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반전의 대목: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인가 오빠가 동네아이들에게 맞고 왔다. 내가 누가 그랬냐며 가자고 했다. 네살이나 어렸지만 내가 복수하겠다고 했는데 오빠는 그만두라고 했던게 기억난다.) 또 다른 에피소드는 할아버지가 미국에 가시게 되었는데, 교육을 위해 오빠를 데리고 갈 계획을 세우셨다고 했다. 부모님은 거역할 처지가 안되었던 것 같다. 공항에서 오빠를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유는 오빠 아래 여동생 나 혼자이고, 당시 엄마가 몸이 약해 다시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모를 상황이어서였다고 한다. 딸 하나만 두고 아들을 먼 타지로 데려간다는 것이 할아버지 마음에 부담이었던 듯 하다.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가끔 오빠가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니가 아들이었으면 그 때 할아버지와 미국으로 갔을텐데, 라고. 그런 말들이 내 마음에 박혀있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대학을 졸업하고 집안이 안정되자 할아버지댁을 떠나 우리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던듯 하다. 그 이후 오빠는 방학 때면 할아버지댁에 다녀오곤 했다. 왜 오빠만 가나 하는 생각도 했던것 같다. 언젠가 나도 갔었는데, 교회에서 운영하던 목장에서 금방 짠 따뜻한 우유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지만 몇 점의 기억들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러다 선교사들에 관한 책이었던듯 한데, 낯익은 여자분이 있었다. 할머니였던듯 하다. 내 추측으로는 할머니는 선교사 집에서 살다가 할아버지와 만나 결혼했던 것 같고, 미국과 관련이 되어서인지 그 당시에도 할아버지는 미국에 여러차례 다녀올 수 있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미국 수박은 크다고 했던 기억도 있다. 흥남부두 철수 당시 그 많은 피란민들이 아우성 칠 때인데도 할아버지는 당신이 목회하던 교회교인들과 함께 배를 탔고 거제도에 올 수 있었다. 급박했던 그 당시도 미국 빽이 통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