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 마음
2020. 3.12(목)
자가격리 중 ‘동안거’라는 단어를 보았습니다. 동안거, 하안거 등의 단어를 [일기일회]에서 찾아봅니다.
2006년 2월12일 겨울안거 해제에 맞춰 법정스님이 말씀하셨던 글을 읽어봅니다. 밑줄이 그어져 있어 읽었던 글임을 알겠지만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읽습니다.
법정, [일기일회], 문학의숲, 2009
“추위가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 매화 향기 어찌 얻으랴”/ 2006.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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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제가 겪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강원도는 눈고장입니다. 그런데 1월 중순께까지도 눈다운 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몇몇 지역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을 때 기우제를 지내듯 기설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눈이 안 오면 스키장도 잘 안 되고 봄가물이 심해져서 농사짓기도 어려워집니다. 기설제를 지낸 덕인지 요즘에 눈이 내려서 강원도다운 풍경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눈이 내리지 않으니 겨울이 완전히 빙하처럼 얼어붙었습니다. 폭포는 빙벽이 되고 개울은 빙하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내린 눈이 얼음 위를 덮어 보호막 역할을 해 주어서 개울 바닥은 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도 듣곤 했는데, 올해는 눈이 내리지 않고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만 계속되었기 때문에 개울이 바닥까지 완전히 얼었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도끼로 얼음장을 20센티미터 정도 깨면 물이 흘렀습니다. 덕분에 물을 떠다 쓰곤 했지만 금년에는 도끼로 개울 바닥까지 파도 물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추웠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산 지 15년이 다 되었는데 올겨울처럼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도 못 듣고 온통 얼어붙은 겨울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눈은 내리지 않고 강추위만 이어지는 환경에서 살면 사람이 메마르게 됩니다. 새소리는커녕 전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도끼로 얼음을 깨도 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괜스레 팔만 아픕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물 없이는 못 사니까 하는 수 없이 얼음을 깨다가 녹여서 식수와 생활용수로 썼습니다. 요 며칠은 눈이 내려서 그것을 떠다 쓴 덕분에 힘이 덜 들었지만, 전에는 흐르는 물이 전혀 없고 온통 빙판이어서 살아가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한 방울의 물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흔히 물 쓰듯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이 얼마나 무례한 표현인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토록 부드럽고 맑고 투명한 물이 한번 굳게 얼어붙으니 도끼로 깨도 잘 깨지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도 주변 상황에 의해 한번 얼어붙으면 그처럼 견고해집니다. 모진 마음을 먹으면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심여수( 心如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은 흘러야 합니다. 그것이 살아 있는 물의 징표이고 생태입니다. 물은 흐름으로써 자신도 살고 만나는 대상도 살립니다. 저는 이번 겨울 새삼스럽게 물의 생태, 물이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날마다 시시각각으로 느꼈습니다.
물이 한곳에 갇혀 있거나 고여 있으면 생명력을 잃고 급기야 부패하고 맙니다. 우리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마음 역시 굳어 있거나 어디엔가 갇혀 있으면 온전한 마음이 아니고 병든 마음입니다. 물이 흘러야 그 생명력을 유지하듯이 마음도 살아서 움직여야만 건강한 마음이 됩니다.
절에서 마음 닦는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무엇으로 닦습니까? 마음이 눈에 보이면 손으로 문지르거나 걸레로 훔치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닦는다는 말은 매우 관념적이고 모호한 표현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마음을 쓰는 일’입니다. 순간순간 마음 쓰는 일이 곧 수행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서 삶이 꽃피어 날 수도 있고 꽉 막힌 벽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법구경> 첫머리에 이와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가령 우리가 생각이 뒤틀려서 가시 돋친 말을 친구에게 던졌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친구에게 가닿기 전에 내 마음에 가시가 박힙니다. 내가 괴롭습니다. 마음을 잘 쓰는 것은 사람답게 살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마치 그림자가 그 실체를 따르듯이.”
이 역시 <법구경>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내 삶이 달라집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각자 자기 마음이 작용하는 것을 살펴보시오. 내가 한 생각 일으켜서 마음을 냉혹하고 매정하게 쓸 수도 있고, 봄바람처럼 훈훈하고 너그럽게 쓸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마음이 참마음인가는 우리 각자가 느끼면 압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정되면 그것은 나의 본마음입니다. 그 러나 마음이 불안하거나 불편하고 무엇인가 개운치 않다면 내 본 마음이 아닙니다.
수행은 어렵게 화두를 들거나 염불을 외기 전에 마음을 쓰는 일입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마음 자체만 가지고는 안되고, 반드시 마음을 쓸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주관적인 입장과 자기 본위의 생각으로는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를 통해 현재의 자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타인은 내 마음을 밝게 할 수도 있고 어둡게 할 수도 있는 하나의 매개체이자 대상입니다. 어디에도 걸림 없이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으려면 만나는 사람에게 따뜻한 마음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남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의 삶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람만이 아닙니다. 물건도 대하고, 어떤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살피십시오. 내가 온전한 마음을 쓰고 있는지 잘못 쓰고 있는지 스스로 주시해야 합니다. 마음을 닦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마음을 쓰는 일입니다. 바르게 써야 바르게 닦입니다. 그래야 마음에 빛이 납니다.
친구를 통해서, 혹은 자식과 남편과 아내를 통해서 자신의 실체를 그때그때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한가족이라 하더라도 우연히 만난 사이가 아닙니다. 몇 생에 걸쳐 가족을 이룰 인연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그런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이번 생에서 가족으로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화목하게 지내는 가족도 있지만 원수 보듯 서로 미워하면서 지내는경우도 많습니다. 이것이 중생계의 구조입니다. 마지못해 ‘싫어, 싫어.’ 투덜대고 어떤 대상을 미워하며 살게 되면 나 자신이 미워집니다.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생애를 그렇게 소모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생각을 돌이켜야 합니다. 지극히 관념적인 말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됩니다.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가 부처나 보살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처음에는 어렵지만 부처나 보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부처는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청정법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미운 사람을 부처나 보살로 대해야만 우리의 업이 녹습니다. 미워하고 증오하고 원수처럼 대하면 이번 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음 생 어디선가 또다시 원수가 되어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인과의 소용돌이 속에 사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번 생에 진리의 세계를 만난 것은 묵은 업을 청산하고 보다 새롭고 밝게 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절에도 가고 교회에도 갑니다. 화나는 일이 있다고 해서 화를 잔뜩 내면 스스로가 독의 피해를 입습니다. ‘내가 전생에 남을 힘들게 한 과보를 이번 생에 받고 있구나.’ 하고 좋은쪽으로 생각을 돌이켜야 합니다. 까닭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자세이 보면 모두 원인이 있어서 결과를 이루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갈등은 사소한 업들이 쌓이고 쌓여서 커지는 법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쪽에서 마음을 돌이켜 풀어 버리면 메아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과의 고리입니다. 해탈이란 무엇입니까? 인과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좋은 쪽으로 써야 합니다. 혹시 맺히거나 굳게 닫힌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오늘 해제일을 계기로 다 풀어 버리기 바랍니다. 가벼워야 합니다. 짐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새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안팎으로 거리낌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다운 삶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무엇에 구애되거나 기죽지 말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물론 제 말을 듣고 갑자기 바뀔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 화나게 할 때, ‘나를 깨우치기 위해 내 가까이에서 저런 행동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십시오. 거기에 속지 말고 안으로 거두어들이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부처와 보살로 여겨야 합니다. 그런 수행이 쌓이고 쌓이면 스스로가 부처와 보살이 됩니다.
우리가 절에서 기도할 때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염송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나 자신이 관세음보살이 됩니다. 자비의 화신이 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염송한 사람이 무자비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기도를 해서 힘을 얻는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있는 잠재력을 기도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활짝 꽃피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쓰는 일이고 마음 닦는 일입니다.
황벽 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차례 추위가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 코를 찌를 매화 향기 어찌 얻으랴.”
각자 삶의 현장에서 화창한 봄을 맞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풀어 버리십시오. 그래야 삶이 향기로워집니다. 추운데 바깥에서 제 얘기 듣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