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 가을 - 8
2020. 5.13(수)
[체리토마토파이]
(베로니크 드 뷔르/이세진 옮김, 2019, 청미)
가을
10월 20일 화요일
내가 진짜 노망이 나려나 보다. 어제 투아네트, 자클린, 질베르트를 점심에 초대했다. 인원이 네 명이기 때문에 커피를 마신 후에는 브리지를 몇 판 두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식전주부터 마시고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후식을 낼 때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나는 체리파이를 구워두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겨울에 먹을 체리까지 얼려 두는데 마침 냉동실에 있던 체리가 빨갛고 탱글탱글해 보였다. 체리는 생으로 얼려두면 파이를 구웠을 때 신선한 체리를 쓴 것과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오븐을 예열해두고 체리는 파이렉스 접시에 옮겨 해동시켰다. 그 다음에 달걀, 설탕, 밀가루를 치대어 파이 반죽을 만들고 체리 위에 부었다. 파이렉스 접시를 오븐에 넣고 180도에서 구워낸다. 파이가 다 구워졌으면 오븐에서 꺼내어 식힌다. 원래 체리파이는 식어야 맛있기 때문이다.
치즈와 샐러드를 즐긴 후 각 사람에게 후식 접시와 케이크 포크를 나눠주고 나는 파이를 가지러 갔다. 파이는 금갈색으로 잘 구워졌고 체리도 탱글탱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나는 늘 하는 대로 “조심해서들 먹어, 혹시 체리씨가 남아 있을 지도 몰라.”라면서 파이를 내놓았다. 모두들 큼지막하게 한 조각씩 가져갔다. 우리는 파이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표정이 확 변했다. 아주 희한했다. 사실, 파이는 전혀 맛있지 않았다. 내가 냉동실에서 토마토를 체리로 착각하고 꺼낸 것이었다. 우리 정원에서 자라는 알이 아주 작은 토마토, 일명 체리토마토 말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늘 요리를 하다가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곤 했던 것 같다. 아주 오래전에 딸이 다니던 학교 부속 사제님이셨던 슈발리에 신부님을 집에 초대해서 호두케이크를 대접한 적이 있다. 그때도 내 호두케이크는 인기 만점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다만, 호두를 식재료 다지기에 넣으면서 바로 몇 분 전에 그 기구를 양파 다지는 데 썼다는 사실을 깜빡한 것이 문제였다. 그날의 호두케이크에서는 양파 냄새가 진동했다. 도저히 못 먹을 정도여서 전부 버렸고, 음식 버리는 걸 큰 죄로 아는 르네는 펄쩍 뛰었다. 신부님은 껄껄 웃어넘겼지만 르네는 그렇게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는지 나에게 정신이 있는 거냐고 잔소리를 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을 달래본다. 어차피 옛날에도 없던 정신, 이제 와 잃을 일은 없겠구나.
10월 21일 수요일
아침에 라팔리스에 의사를 보러 갔다. 아파서 간 건 아니다. 나는 병이라고는 모른다. 그냥 독감 예방 접종을 하러 간 거다. 평생 독감을 앓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말이다. 의사와 텔레비전에서 독감 예방 접종을 해야 한다고 하니까 그냥 하는 거다. 늘 가는 진료실이 이전을 했다. 예전에는 의사가 자기 집에 진료실을 차려놓고 환자를 받았는데 지금은 ‘건강 센터’라고 부르는 곳에서 진료를 본다. 의사와 간호사도 여럿이고 물리치료사, 영양사, 발 전문의, 치과의사, 조산사까지 다 한곳에 모여 있으니 편리하기는 하다!
내 담당 의사는 경색을 한 번 일으킨 후로 파트타임 진료만 하고 매우 친절한 여의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오늘 오전에도 그 여의사가 나를 봐줬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서 더 좋았다. 남자 의사 앞에서 맨살을 보이는 게 여전히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 남자 의사가 아마 예순 살 전후일 텐데 그렇다고 해도 나한테 는 젊은 남정네다. 외간 남자 앞에서 팬티나 브래지어를 보이는 건 영 거북하다. 더구나 나중에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도 마주칠 수 있는데.... 그리고 남자 의사에게는 아무래도 말하지 않게 되는 부분들이 있다. 고령의 여성이 마음 쓰는 소소한 걱정거리들이 있는데 남자 의사를 붙들고 그런 얘기는 못 하겠더라. 의사로서 다른 여자 환자들도 많이 봤을 테고 그 중에는 나보다 민감한 여자들도 많이 있었겠지만 어쨌든 좀 난처하다.... 그래서 여의사를 만나면 기분이 좋다. 여의사는 주사를 놓아주고 나서 내 건강 상태를 살폈다. 주사는 하나도 아프지 않아서 거의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녀는 심장 소리를 듣고, 혈압을 재고, 목구멍과 귓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내가 여전히 상태가 좋다고 하면서 혈압약만 조금 늘렸다.
여의사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유방 촬영을 한 게 언제인지 물었다. 세상에, 이게 뭔 소리람! 평생 단 한 번도 유방 엑스레이를 찍은 적 없는데 굳이 아흔 살에 처음을 찍을 필요가 있을까. 뭐에 써먹으려고? 설령 나에게 몹쓸 종양 같은 것이 있더라도 이 나이에 치료를 받는 게 옳을까? 장수의 복을 누리는 사람한테서는 그런 병이 아주 서서히 진행된다. 그러니까 내 몸에도 어디 한두 군데쯤 암세포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내 나이에도 병도 느릿느릿 진행되기에 큰 소란을 떨지 않고 화도 거의 끼치지 않는다.
10월 22일 목요일(아침)
6시다. 밤새 한잠도 못 잤다. 지금도 침대에 누워 있지만 차마 일어나거나 덧창을 열어볼 용기가 없다. 그놈들이 갔을까? 오 하느님, 무서워 죽을 것 같다.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는데도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자정쯤이었을 거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가 나와 내 동생에게 무서워 죽을 것 같다가 결국은 웃느라 눈물이 나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을 한다. “자정은 범죄가 일어나기 좋은 때지....” 아버지가 무덤 저편에서 말하듯이 목소리를 쫙 깔고 음산하고 숨 막히는 광경을 묘사할 때면 우리는 정말로 겁이 났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졌다. “갑자기, 깊은 밤에 무시무시한 고함 소리가 들렸지....” 그러고는 아버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아델라이드! 요강 좀 갖고 와!” 그러면 우리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기가 좀 옆으로 샜는데, 아무튼 나에게 자정은 여전히 좀 불안한 기분이 드는 때다.... 요컨대, 자정 즈음에 나는 무슨 소리를 들었다. 덧창 밖에서 번쩍하는 불빛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불을 켜지 않고 가만히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다행히 완전히 컴컴하지는 않았다) 역실로 건너가 복도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거기서는 창문을 통해 테라스가 보인다. 나는 그들을 봤다. 사내 두 명이었다. 키가 큰 남자는 대머리였고 작은 남자는 운동모를 썼다. 그들이 손전등을 들고 거실로 통하는 유리문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득달같이 침실로 돌아가 침대머리 탁자 옆 큼지막한 회색 경보 버튼을 눌렀다. 귀청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굉음이 당장 울려 퍼졌다. 나는 침대에 웅크려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한 몇 시간을 그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어디 있는지, 뭘 하는지, 그들이 집안에 들왔는지 경보음을 듣고 도망쳤는지조차 몰랐다. 문 열리는 소리가 날까 가슴을 졸였고, 놈들이 들어오더라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기만을 바랐다... 경보음은 그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처음에는 죽은 사람도 벌떡 일어날 것처럼 사이렌이 울리더니 잠시 후에는 날카롭게 찢어지는 신호음들이 시리즈로 나왔다. 몇 시쯤 경보음이 멈췄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영원처럼 기나긴 시간이었다. 그동안 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그다음에 페르낭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