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낭독 가을 - 17
이춘아
2020. 5. 26. 05:31
[체리토마토파이]
(베로니크 드 뷔르/이세진 옮김, 2019, 청미)
가을
11월 17일 화요일
잠을 잘 못 잤다. 그놈의 보험 문제가 걱정이 되어서 마음 편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만약에 진짜로 시급한 일이라면? 그래서 오늘 아침에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보험을 바꿨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한다. 파스칼이라는 사람이 보험 배상 의무 문제로 전화를 걸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일 없다고 한다. 아는 사람 중에서 파스칼은 없다고 한다. 아들은 그런 메시지의 목적은 단 하나라고. 어떻게든 그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게 하려고 쓰는 꼼수일 뿐이라고 한다. 그 번호로 걸면 전화 요금이 천문학적인 액수가 나오니까 절대로 걸면 안 된다나. 전화뿐만 아니라 문자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딸이 지난번에 문자 읽는 법을 가르쳐줬다. 내가 모든 메시지를 확인했는데도 이상하게 화면 상단의 편지 봉투 표시가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내가 못 들은 메시지가 있나 해서 두 번, 세 번 다시 확인을 했다. 음성 메시지 안내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제 새 메시지가 없습니다.” 소리만 해댔다. 내가 이 이야기를 딸에게 했더니 “아, 음성 메시지가 아니라 문자 메시지가 온 거예요.”라면서 설명을 했다. 그것도 나는 통 모르는 얘기였다. 난 휴대전화로 뭘 쓸 수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
나는 편지를 쓰고 싶으면 휴대전화가 아니라 편지지와 펜을 사용한다. 뭐, 그건 그렇고, 그때 딸이 문자 메시지 읽는 법을 가르쳐줬다. 그쪽으로도 남이 돈 가로채려는 수작질이 쇄도해 있었지만 작년 1월에 손주들이 보낸 문자 메시지들까지 섞여 있었다. “할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키스를 보내며, 레아.” 지금은 문자 메시지를 읽을 줄 알지만 답장 보내는 법은 모른다. 글 쓰기가 너무 복잡하다. 예를 들어 ‘나는’이라는 말만 쓰려고 해도 자판을 계속 찾아서 두드려야 하니! 앓느니 죽지! 그리고 이제 이렇게 알아들을수 없는 문자 메시지들이 쇄도해서 나보고 전화를 다시 걸어달라는 둥, 무슨 글자를 자판으로 치라든가 답장을 보내라는 둥, 희한한 첨부 이미지가 있질 않나,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MMS’를 보라든가 음성을 들으라든다..... 그리고 이것도 다 애먼 사람 등쳐먹는 수작이라고 한다! 맙소사, 도대체 어쩌라는건가? 이 시대는 심히 피곤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가 아직은 노망이 나지 않았어도 이런 식으로 시달리다가는 정신줄을 놓아버릴 것 같다....
11월 18일 수요일
오늘은 좋은 일을 한 가지 했다. 오데트를 보고 왔다. 좋아서 간 건 아니지만 가끔은 재미없고 따분한 일도 할 줄 알아야 하니까.... 길이 끝나고도 한참 더 가야 나오는 그 달동네 집에까지 찾아가지 않은 지가 1년이 넘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겁이 나서 거기까지는 잘 가지 않는다.
오데트는 알츠하이머 치매를 앓고 있다. 그래도 사람은 알아본다. 뭐, 그것도 내 느낌에 그렇다는 거지만 ..... 오데트는 미소를 지으면서 “잔....” 이라고 불렀다. 오제트를 돌봐주는아주머니가 나를 거실에 앉히고 오렌지에이드와 조금 눅눅한 비스킷 몇 개를 내왔다.
나는 오데트 집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렇게나 재미있던 사람이 어찌나 딱하게 되었는지, 내가 말을 하면 오데트는 듣는 것처럼 보였고 가끔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도 끄덕끄덕했다. 30분 정도 지나니 나는 더는 할 얘기가 없었고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데트가 조금씩 정신을 딴 데 놓는 느낌이 들었다. 그 친구는 몸만 여기 있었다. 오데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시선이 멍해졌다. 오데트는 자기만의 세상에서, 우리도 머지 않아 알게 될 이세상과 저세상 사이 어떤 곳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지금은 아무도 그녀가 가 있는 곳에 갈 수 없었다.
오데트는 나중에는 내 존재마저 잊은 것 같았다. 지금 그녀는 거의 모든 것을 잊었다. 내가 뽀뽀를 하면서 작별 인사를 했더니 그녀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곳을 응시하면서 기계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오데트에게 가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나의 방문은 오데트에게 큰 의미가 없다. 반면, 나 자신에게는 너무 괴로운 일이다. 나도 오데트처럼 될까 봐 두렵다. 노인네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치매에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편이 낫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이제 다시는 오데트를 보러 가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내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아도 오데트는 그 사실을 모르겠지. 지금쯤이면 내가 왔다 간 것도 틀림없이 잊어버렸을 테지. 조금 더 있으면 내 이름마저 떠올리지 못하게 될거다. 그러니 찾아간들 무엇하겠는가?
차를 몰고 오면서 예전에 미용실에서 오려온 기사를 다시 생각했다.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아서 “나는 10개 중에서 2개밖에 해당되지 않아.”라고 계속 혼잣말을 되뇌었다. 나의 자체 검사가 벌써 다섯 달 전 일이라는 사실은 잊고 싶었다....
11월 19일 목요일
어젯밤에도 잠을 잘 못 잤다. 비가 밤새 덧창을 때리고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벽난로에서까지 쉭쉭 소리가 났다. 아침에 덧창을 열어보니 태풍이 정원을 휩쓸고 간 것 같았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잔디밭, 자갈길 , 오솔길, 심지어 현관 앞에까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아침에는 비가 그쳤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사방이 축축하게 젖어 있긴 했지만 비바람이 가시고 해가 나는 분위기였다. 바람이 어제 하늘에 가득하던 구름들을 싹 쓸어갔다. 어제는 하늘이 어찌나 낮아 보이던지 금방이라도 내 머리 위로 내려앉을 것 같았다. 산책을 나가려면 한 번 더 낡아빠진 장화를 신어야겠다. 오솔길이 아직 미끄럽지만 나는 산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옷을 챙겨 입고 마당에 떨어진 잔가지들이라도 줍고 싶다. 잘 마르면 땔감으로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마침 땔감이 부족한데 잘됐다. 오솔길 끝까지 걸어가지 않더라도 나뭇가지를 주워 모으면서 운동도 하고 바람도 쐘 수 있겠다. 어디 그뿐인가, 정원사가 크고 굵은 나뭇가지들을 치우고 갈퀴질을 하기 전에 마당을 청소하는 셈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