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낭독 "몰입의 황홀함"

이춘아 2020. 5. 31. 06:10

2020. 5.31(일)

김영갑 사진.글, [그 섬에 내가 있었네], human & books, 2004


“몰입의 황홀함”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만류했지만 사진 갤러리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내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하나에 깊이 몰입하지 않는다면 나는 중환자로서 우울하고 절망적인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꼭 완성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다. 만일 처음부터 완성을 생각했다면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그저 오늘 하루만, 한 주만, 한 달만, 내 힘이 닿는 데까지만 해볼 생각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온몸의 기력이 소진해 카메라를 들기는커녕 손가락 힘이 없어 셔터조차 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거나 앞뒤고 움직일 수도 없다. 잔인한 통증 때문이다. 허리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고 두 다리는 후들거려 중심을 잡기도 힘들다. 돌멩이 하나에도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 일쑤이다. 팔의 근육이 녹아버려 한 손으로는 휴지 한 장 들어 올릴 수가 없다. 국물에 밥을 말아도 목으로 넘기지 못한다. 죽을 넘기기에도 힘에 부친다. 

온종일 누워만 지내기에는 하루가 너무 길다. 사진을 찍을 수 없는 하루는 너무 더디 간다. 침대에 누워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적을 소망하는 것 뿐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세월을 들추며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나의 일이다. 

슬픔이 밀려온다. 무기력해진 모습에 우울해진다. 침대에 누워 우울해해도 하루는 간다. 무언가에 몰입할 수 없는 하루는 슬프다. 

이것은 내가 생각했던 삶이 아니다. 나에게 허락된 하루를 절망 속에서 허무하게 떠나보낼 수는 없다. 쓰러지는 그날까지 하루를 희망으로 채워가자. 내일이 불안하다고 오늘마저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긴장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하루하루를 희망과 설렘으로 살아가자. 또다시 오늘이 시작되면 새로운 하루에 몰입하는 것이다. 

갤러리를 완성하겠다는 욕심을 버렸다. 욕심이 지나치면 화를 부른다는 옛말 때문이 아니라 내 몸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내일을 생각하면 포기하고 싶었지만 오늘을 생각하면 다시금 용기가 솟구쳤다. 

겨울이 되자 갤러리의 윤곽이 드러났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내 꿈이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봄이 되면서 공사에도 탄력이 붙었다.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만 매달려 몸이 아프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냈다. 한결같이 만류하던 지인들이 어이없어했다. 귀신에 홀린 사람 같다고 혀를 찼다. 그럴수록 나는 갤러리를 꾸미는 일에 더 매달렸다. 
2002년 여름 공사를 시작한 지 일 년여 만에 마침내 꿈에 그리던 갤러리가 완성되었다. 처음 문을 열던 날 따로 기념식을 하거나 번거로운 자리를 마련하지는 않았다. 전시 공간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운동장을 정원 겸 산책로로 조성하는 일이 아직 남았다. 넓지 않은 학교 운동장을 제주를 상징하는 것들로 채워 작은 제주처럼 만들고 싶었다. 

갤러리가 완성되고 나서도 지인들의 걱정은 잦아들지 않았다. 누가 시골 갤러리를 찾겠느냐고, 관람객이 없어도 실망하지 말라고 지레 위로했다. 실망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런데 막상 문을 열고 보니 사람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졌다. 시골 마을 폐교를 이용해서 갤러리를 만들었다니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것일 테고, 한두 달 발길이 이어지다 곧 뜸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따로 사람을 들이지 않고 불편한 몸으로 직접 관람객들을 맞았다. 가을이 되자 관람객이 두 배로 늘어났다. 겨울에는 평일에도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갤러리를 지켰다. 관람객들의 반응이 예상 외로 뜨거웠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제주의 아름다움을 모아 폐교 운동장을 정원으로 가꾸었다. 나무와 억새, 야생초를 옮겨 심고, 밭가에 버려진 돌을 실어 와서 돌담을 쌓았다. 꾸미지 않은 듯 꾸며서 제주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정원의 모습이었다. 

갤러리를 통해 내 영혼을 뿌리째 뒤흔든 제주의 아름다움이 모두를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럴수록 신명이 났다. 정원 산책로를 만드는 일도 계속되었다. 돌담을 쌓았다가 허물었다가 또 쌓았다. 조화가 맞지 않다 싶으면 또다시 허물기를 반복했다. 인부들은 짜증을 부렸다. 그때마다 그들을 설득하고 다독이며 공사를 강행했다. 주위에선 미친 짓이라고 만류했다. 경북 영천에서 천연 염색을 하는 어느 지인은 편지에다 걱정 반 협박 반을 담아 보냈다. 

갤러리로 직접 찾아오거나 전화로 편지로 나를 만류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고집을 꺾지 않는 이유가 있다. 

제주에 정착해 사진 작업을 하는 동안 들이나 바다에서 나는 보았다. 한겨울 매서운 바람에도 물질을 하는 해녀와 한여름 무더위에도 김을 매고 수확하는 노인들... 장성한 자식들이 만류해도 노인들은 고집을 꺾지 않는다. 저승 갈 노잣돈 만들어 통장에 넣어놓고도 욕심을 부린다며 사람들이 수군거려도 개의치 않는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데 놀고 먹는 것은 죄악이라며 새벽밥 먹고 일을 나간다. 자식들한테 짐이 되기 싫어 팔순 나이에도 노동을 하고 손수 끼니를 해결한다. 

바다에서 들에서 노인들을 지켜보면서 삶에 대해 생각했다. 배운 것이 없어 평생 일만 했다는 노인들은 내게 많은 것을 일깨워주었다. 풀처럼 나무처럼 온몸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온 노인들은 내 삶의 이정표가 되었다. 거동 불편한 몸으로 힘든 노동을 마다 않는 노인들처럼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일을 해야 한다. 형제들이나 이웃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갤러리 공사에 몰입하는 동안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이를 악물고 일에 매달렸지만 통증을 견디기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싶었다. 산다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체념한다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 쓰러질 때까지, 조금만 더 견디자. 

거울 속 내 모습은 초라한 노인이고, 서서히 임종을 기다리는 말기 환자처럼 변해간다. 나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싫다. 달빛에 드러나는 그림자마저 미라의 모습이다. 내 몸 어디에도 근육이란 없다. 감출 수 없는 손발과 목, 얼굴은 뼈만 앙상하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관람객들은 눈물을 글썽인다. 잘 꾸며놓은 갤러리가 아까워서 어쩌느냐고 울먹인다. 고생 고생해서 작업한 사진들을 어쩔 거냐고 조심스럽게 묻는다. 유언은 써놓았냐고 궁금해한다. 목사님과 수녀님은 기도할 테니 용기 잃지 말라고 위로한다. 장애인의 몸으로 어떻게 갤러리를 운영할 거냐고 걱정을 한다. 입장료를 받아야 한다며 도청으로 군청으로 방법을 알아봐 주기도 한다. 찻집을 만들어라, 자판기를 들여놓아라, 후원금 함을 설치하라며 관람객들이 더 안타까워한다. 

나에게 내일이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다. 허락된 것은 오늘 하루, 그 하루를 평화롭게 보낼 수 있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아픔도 잊혀진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통증을 의식하지 못한다. 통증을 잊으려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또 다른 하루가 허락되면 또 다른 일을 찾는다. 몰입할 수 있는 일은 끝이 없어서 찾으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오늘도 어제처럼 편안하다. 하루가 편안하도록 오늘도 하나에 몰입한다. 절망의 끝에 한 발로 서 있는 나를 유혹하는 것은 오직 마음의 평화이다. 평화만이 나를 설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