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1920년대 상해"(3)

이춘아 2020. 6. 20. 05:48

2020.6.20(토)

조선희, [세여자], 한겨레출판, 2017.


1920년 가을, 허정숙이 도착한 며칠 뒤 상해역에는 통치마 저고리의 젊은 조선 여성 또 하나가 개찰구를 통과해 들어왔다. 혼자 상해로 오는 조선 유학생 중에 여자는 드물던 시절이었다.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긴장과 흥분이 뒤섞인 낯빛으로 두리번거리는 그녀를 대합실에서 한 남자가 반갑게 마중했다. 

“여이, 세죽 양!”

남자가 세죽의 가방을 받아 들며 말했다. 

“하숙집 잡아놨으니 일단 짐 풀고 영생학교 선배들 만나는 것은 내일 해도 늦지 않을 거 같소.”

“일단 집으로 전보부터 쳐야겠어요. 전신국 어디있죠?”

세죽의 하숙은 프랑스조계였다. 마중 나왔던 영생학교 선배는 하숙방에 짐가방만 넣어주고는 바로 떠났다. 상해역부터 꽤 먼 길을 걸어오는 동안 상해 정세와 독립운동가들의 형편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침 튀기던 그는 하숙방 앞에서 돌연 수줍은 청년이 되어 세죽의 시선을 피하면 내외를 했다. 그는 방 안에 발끝도 대지 않고 문간에서 돌아 나갔다. 

1920년의 상해는 나이 스물의 식민지 청년들이 자유와 해방의 공기에 한껏 들뜰 만한 도시였다. 퇴폐와 향락의 도시였지만 동시에 사상과 문화의 별천지였다. 동양이면서 서양이었고 중국이면서 유럽이었다. 근대식 석조건물들이 아스팔트 대로를 따라 즐비했고 프랑스조계에는 식민지 베트남 남자들이 순사복 차림으로 경계를 섰고 영국조계에는 터번을 두른 인도 순사가 돌아다녔다. 또한 백주대낮에 조폭집단 청홍방이 사제폭탄으로 빌딩 하나를 날려버리기도 하고 밤마다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암살 사건이 일어났다. 챙이 넓은모자를 쓰고 금시계를 찬 신사 숙녀들이 백화점과 오락관을 드나드는 번화한 거리 뒷골목에선 아편굴이 번창했고 식민지 조선의 망명객들이 개미굴 같은 하숙들을 얻어놓고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프랑스조계는 거리나 상점, 학교에서도 영어나 불어를 썼다. 점원이나 인력거꾼, 하인들만이 중국이이었다. 

허정숙과 주세죽은 같은 프랑스조계에서 상해생활을 시작했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마도, 그 상해 바닥에서 조선 여학생끼리 서로를 알아보았을 때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아마도 국제도시에 성업중인 어느 어학원에서였을 것이다. 

정숙과 세죽은 서로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상해에 언제 왔는지, 어디서 묵고 있는지, 지내긴 어떤지도 물었다. 누구와 같이 왔는지 물었을 때 각기 혼자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두여자는 급 친밀감을 느꼈다. 그리하여 경성! 함흥! 단답형으로 시작한 대답은 점점 장황해지고 대화는 화기애애해졌다. 정숙이 세죽에서 ‘어떻게 상해에 오게 됐는지’ 물었다. 

“귀찮게 하는 일본 형사가 있어서요.”

“왜, 녀석이 추근댔나 보죠?”

“무슨? 맨날 감시 붙고 걸핏하면 가택수색이다해서.”

“아, 어쩌다 요시찰 인물이?”

“3.1만세 때 덩달아 만세 좀 불렀거든요. 그쪽은 어째서 상해로? 집안에서 허락하시던가요?”

“당연히 허락 안 하죠. 몰래 도망친 거예요. 완고한 존장에게서 탈출한 거죠.”

“부친께서 많이 엄격하신가 보죠?”

“네, 딸의 인생을 자꾸 자기 기준에 맞추려고 하니까.”

“봉건시대 가부장들이 대체로.  부친께서 유학자신가요? 구학문 하시는?”

“아니요. 변호사예요.”

“어마, 그래요? 근데 변화사들은 현대적이잖아요. 민족지도자도 많고. 33인 변호하신 허헌 변호사를 비롯해서. 변호사는 다 그런 분만 계신 줄 알았는데.”

“어... 우리 아버지가 허헌이예요.”

둘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로 마주 보았다.  ‘아, 고향이 함흥이고 영생여학교 출신이랬지. 아버지를 알 수밖에 없겠네. 세상 참 좁구나.’ ‘그러고 보니 눈매 하며 허 변호사님 그대로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세상 사람들이 다 존경하는 분인데 가족에겐 모질게 하신단 말인가? 아무튼 세상 참 좁구나.’ 마주 보는 표정 위로 그런 생각들이 흘러갔다. 

“정말 반갑네요. 아버지가 함흥에 많이 계시고 해서 나도 함흥은 고향이나 마찬가지예요. 영생학교 출신을 상해에서 만나다니! “

“나는 부친께서 곰방대 빨아대며 에헴 에헴 하는 그런 분인 줄 알았어요. 허 변호사님은 내가 제일 존경하는 어른이예요. 3.1만세 때 함흥 사람들은 변호사님 덕분에 형이 많이 가벼워졌다고들 해요. 나도 변호사님 아니었으면 정식 기소돼서 감옥살이했을지 몰라요.”

둘은 서로의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게 나이를 확인했다. 

헤어져 돌아가는 길에 세죽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함흥에서 길 가는 청년 아무나 잡고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 물으면 둘에 하나는 허헌이라 할 것이다. 독립운동가나 억울한 일 당한 서민들은 모두 그를 찾아갔고 그는 무료 변론을 해주었다. 그리고 지주나 기업인 같은 부자들의 소송으로 번 돈은 학교와 병원, 교회, 사회단체에 쏟아부었다. 영생학교, 제혜병원, 함흥기독청년전도회도 모두 물질적 법률적으로 그에게 의지했다. 그런데 그런 인사가 집안에선 폭군이란 말인가.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귀하게 자란 외동딸의 포시라운 투정인지도. 

정숙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기분이 좋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정숙은 이 함흥 여자가 딱 마음에 들었다. 통째로 마음에 쏙 들었다. 정숙은 기억 속에서 함흥 장터거리를 불러냈다. 그곳에서 통치마 저고리 차림의 영생여학교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었고 그 가운데 어색하게 그린 태극기를 들고 선 세죽이 있었다. 세죽은 1901년생. 정숙보다 한살 위였다. 정숙은 중얼거렸다. 

“옛날 선비들은 10년 아래위로 평교 했다는데, 친구 하기 딱이네.”

박헌영도 1920년 11월, 두 사람과 엇비슷하니 상해에 들어왔다. 정숙과 헌영은 여자교육협회 일을 함께 했고 경성에서부터 서로 아는 사이였다. 좁은 프랑스조계 어디서 마주쳤건 둘은 깜짝 놀랄 만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상해는 뜻밖의 장소였던 것이다.

“어머, 박 선생. 동경으로 가신 줄 알았는데.”

“학비가 너무 비싸서 다시 이리로 왔어요. 그나저나 정숙 씨야말로 상해에 웬일이오? 조선 팔도를 누비며 부인계몽운동에 불철주야 노고가 크신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임시정부 찾아가려고요. 뭐 농담이고. 상해에 나오면 길이 보일 것 같아서요. 근데 요새도 영시 번역하고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