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민 노인전' (1)

이춘아 2020. 7. 25. 02:00

박지원,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홍기문 옮김), 보리, 2004.

박지원(1737~1805): 노론 명문가인 반남 박씨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를 보지 않았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귀며 학문을 닦았다. 홍국영의 세도정치를 피해 황해도 금천의 연암골로 들어가 살며, ‘연암’이라는 호를 가지게 되었다. 쉰 살 넘어 정조의 부름을 받고 선공감역, 안의현감 등을 지냈다. 홍대용과 깊이 사귀었고,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들의 스승이자 벗이었다. 문학, 철학, 사회 사상, 행정, 과학, 음악 따위 두루 학식이 깊어 뛰어난 글을 많이 써 당대 사람들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양반전’ ‘범의 꾸중’을 비롯한 단편 소설 십여 편, 시 사십여 수, 농업과 토지 문제를 개혁하려는 사상을 쓴 ‘과농소초’, 여러 가지 문학론과 사회 개혁 사상, 편지글들이 [열하일기]와 [연암집]에 수록되어 있다. 


'민 노인전' (1)

지난 계유년(1753), 갑술년(1754) 어간에 내 나이 열일곱, 열여덟이 되었는데 오랫동안 몸이 성치 못해서 정신도 피로해 버렸다. 음악, 서화, 옛날의 칼과 기명, 기타의 골동품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또 우스갯소리나 옛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여러가지로 위로하게 하기도 하였으나 울적한 기분을 풀어헤치지는 못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민 노인을 소개하면서 노래도 잘 부르고 언변도 아주 좋고 기걸하고 익살스러워서 그와 만나 이야기하는 사람은 모두 속이 시원해진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서 곧 그와 함께 와 줄 것을 청하였다. 

민 노인이 왔을 때 나는 마침 사람들과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인사도 없이 퉁소를 부는 사람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고만 그의 따귀를 후려갈기면서 큰 소리로 꾸짖었다. 

“주인은 즐거워하는데 네가 무슨 까닭으로 골을 내는 것이냐?”

내가 깜짝 놀라 까닭을 물었더니 그가 말했다. 

“저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얼굴에 핏대까지 올렸으니 그게 그래 골이 난 게 아니고 무엇이오?”

나는 고만 크게 웃었다. 그는 계속해 말하였다. 

“어찌 퉁소 부는 사람만이 골을 내는 것이겠소. 젓대를 부는 사람은 얼굴을 돌리고 있는 것이 마치 우는 상이요, 장구를 치는 사람은 찡그리고 있는 것이 마치 근심스로운 상이요, 온 좌석이 잠잠해서 큰 공포에나 쌓인 듯하고, 하인들은 웃고 떠드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니 음악을 가지고 즐겁게 놀 수 없는 것이오.”

내가 드디어 곧 음악을 집어치우고 민 노인을 윗자리로 맞아들였다. 그는 키가 조그마하고 흰 눈썹이 눈을 덮었는데 이름은 유신이요, 나이는 일흔셋이라고 말하였다. 그 다음 나더러 물었다. 

“그대가 무슨 병을 앓소? 머리가 아프오?”

“아니오.”

“배가 아프오?”

“아니오.”

“그러면 병이 없는 것이구려.”

고만 미닫이를 밀어젖히고 들창을 열어 버리니 바람이 쏴하고 불어 들어왔다. 내 마음속도 약간 시원해지는 듯한 것이 그전과는 훨씬 다른 것 같았다. 밥을 잘 못 먹고 잠을 잘 못 자는 것이 내 병이라고 이야기했더니 그는 벌떡 일어나서 나에게 축하 인사를 하였다. 내가 놀라서 물었다. 

“노인장이 무슨 치하를 하시는 것입니까?”

그가 말하였다. 

“그대의 집안이 가난한 터에 밥을 잘 먹지 않는다니 그만큼 재산에 여유가 생길 것이요. 잠을 잘 안 자면 남보다 밤을 더 사는 것이니 생활이 곱절로 길어지는 것이오. 재산에 여유가 생기고 생활이 곱절 길어지면 그것은 수하고 또 부하게 된 셈이오.”

조금 있다가 밥상이 나왔으나 내가 상을 찡그리고 먹지 못하면서 이것저것 집어서 냄새만 맡는데 민 노인이 화를 버럭 내면서 일어서 가려고 하였다. 내가 놀라서 물었다. 

“노인장은 왜 화를 내고 일어나시는 것입니까?”

“그대가 손을 청해 놓고 혼자만 먼저 밥을 자시려고 하니 그것은 예모가 아니오.”

나는 그에게 사과하면서 그를 붙들어 앉히고 밥상을 차려 내왔다. 그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옷소매를 걷어올린 다음 숟가락과 젓가락을 왈각달각 놀리는데 나도 모르게 입 속에 침이 돌고 구미가 당겨 그전과 같이 밥을 먹었다. 

밤에 민 노인은 눈을 딱 감고 단정히 앉았다. 내가 말을 걸려고 했으나 그는 어욱 입을 봉하고 있어서 다소 무료해졌다. 한참 만에 그가 갑자기 일어나서 촛불을 돋우면서 말하였다. 

“내가 젊어서는 한 번만 본 것이면 곧 외웠더니 이제는 늙었단 말이오. 그대와 약속을 정하고 그전에 보지 못한 책을 가지고 속으로 두세 번 읽어 본 다음 곧 외기 내기를 해 보고 싶소. 만약에 한자라도 틀리거든 약속대로 벌을 받기로 합시다.”

나는 그의 나이가 많은 것을 업신여겨 그렇게 하자고 승낙하였다. 곧 책탁자에서 [주례]를 끄집어 내어 그는 ‘고공’ 편을 짚고 나는 ‘춘관’ 편을 짚었다. 얼마 안 지나서 그가 소리지르며, 

“나는 다 외웠소.”

하였다. 그때 나는 채 한 번 내려 읽지도 못하였다. 놀라서 그를 잠깐 기다리라고 하였으나 그가 나를 자꾸 쓸까슬렀다. 나는 그럴수록 더욱 외워지지는 않고 졸음만 오기에 고만 자 버리고 말았다. 이튿날 그더러 어제 왼 것을 아직 잊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그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는 애초에 외지를 않았소.”


“노인장이 이 세상에서 가장 맛난 것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보다마다, 달이 그믐께로 들어서면 썰물이 나가고 갯바닥이 나오거든 갈아서 밭을 만들고 바닷물을 대어 굽는단 말일세. 구은 것은 수정처럼 되고 가는 것은 백금처럼 되네. 무슨 음식이나 맛을 내자면 소금이 안 들고 어떻게 되겠나?”

모든 사람이 다 옳다고 하면서 단지 장생불사하는 약은 그도 보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건 내가 아침 저녁으로 늘 먹는 것인데, 어찌 보지를 못하겠나? 큰 산골에서 자라는 소나무에는 단 이슬이 맺히고 그것이 다시 떨어져 땅으로 들어가서 천년을 지나면 복령이 되네. 인삼은 나주 소산이 제일인데 형체가 고르고 빛이 붉으며 사지를 갖추고 쌍상투를 짠 것이 마치 동자와 다름이 없네. 구기자가 천년을 묵은 것은 사람을 보고 짖는다고 한다네. 

내가 이런 것을 먹으면서 다른 음식은 입에 대지 않은 지 그럭저럭 백날이 되었네그려. 숨을 헐헐하면서 거의 죽게쯤 되었을 적에 이웃 할머니가 와 보고는 한숨을 지으면서 말을 하데. ‘임자의 병은 주림증이오. 옛날에 신농씨가 온갖 풀을 맛본 다음 오곡을 처음으로 심기 시작했소. 병을 다스리는 것은 약이요. 주림증을 고치는 것은 밥이니 이 증세를 오곡이 아니로는 고치지 못할 것이오.’ 하고는 쌀이며 좁쌀로 밥을 만들어 먹이는 바람에 죽지를 않았네. 장생불사 약이 밥만 한 것이 없데. 내가 아침에 한 그릇, 저녁에 한 그릇 이렇게 지금 벌써 칠십여 년이란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