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말거간 전' (2)

이춘아 2020. 8. 2. 07:56

박지원,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홍기문 옮김), 보리, 2004.

박지원(1737~1805): 노론 명문가인 반남 박씨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를 보지 않았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귀며 학문을 닦았다. 홍국영의 세도정치를 피해 황해도 금천의 연암골로 들어가 살며, ‘연암’이라는 호를 가지게 되었다. 쉰 살 넘어 정조의 부름을 받고 선공감역, 안의현감 들을 지냈다. 홍대용과 깊이 사귀었고,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들의 스승이자 벗이었다. 문학, 철학, 사회 사상, 행정, 과학, 음악 따위 두루 학식이 깊어 뛰어난 글을 많이 써 당대 사람들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양반전’ ‘범의 꾸중’을 비롯한 단편 소설 십여 편, 시 사십여 수, 농업과 토지 문제를 개혁하려는 사상을 쓴 ‘과농소초’, 여러 가지 문학론과 사회 개혁 사상, 편지글들이 [열하일기]와 [연암집]에 수록되어 있다.


'말거간 전' (2)


익살 선생은 우정론에 이렇게 썼다. 

나무 쪽을 붙이는 데는 아교면 그만이요, 쇠를 때는 데는 붕사면 그만이요, 사슴과 말의 가죽을 포개어 붙이는 데는 찹쌀풀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그러나 벗을 사귀는 데 이르러는 항상 버름하게 틈이 있으니 남쪽 나라에서 북쪽 나라까지 거리가 멀어서 틈이 생기는 게 아니요. 산과 물이 막아서 틈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무릎을 맞대고 한 자리에 앉았다고 해도 붙지 못하고 어깨를 치고 옷소매를 부여잡는다고 해도 합해지지 못한다. 그런 사이에도 역시 틈이 벌어져 있는 것이다. 

일찍이 위앙이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으니까 진나라 효공은 고만 졸아 버리고 말았다. 또 만일 범수가 화를 내지 않았더라면 채택은 입만 벌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위앙을 책망해서 진 효공을 다시 만나게 하는 사람도 나서게 되었고, 채택의 말을 떠벌려 범수를 화나게 한 사람도 있었으니, 공자인 조승이 소개한 것이다. 대체 진여와 장이는 본래 틈이 없는 사이였건만 한번 틈이 생기자 그들의 사이를 어떻게 해 볼 수 없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것이 틈이 아니요, 무서운 것이 틈이 아니라, 오직 아첨이 틈을 가로타고 들어서 맞붙고 참소가 틈을 비집고 덤비어서 갈라 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잘 사귀는 사람은 먼저 틈을 이용하고, 남을 잘 사귀지 못하는 사람은 틈이 아무짝에 소용이 없다. 

대체 곧게 갈 수 있는 것이 지름길인데 잘 휘더듬어 나가려고도 하지 않고, 좀 둥글려 해 보려고도 하지 않고, 말 한 마디에 의가 벌어진다면 다른 사람이 갈라 놓았다기보다도 자기 스스로 막 잘라 버리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속담에 이르기를 나무를 베고 베어 열 번을 찍으면서도 미끄러지지 않았다고 하고, 또 아랫목에 곱게 뵐 바에는 차라리 부엌에 곱게 뵈라고 한 것이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아첨을 하는 데도 방법이 있다. 몸을 가다듬고, 얼굴을 꾸미고, 말은 얌전히 하고, 명예와 잇속에 담박하고, 벗을 사귀는 데도 별로 뜻을 두지 않아서 제대로 곱게 뵈는 것이 가장 윗길의 아첨이다. 그 다음에는 입바른 말을 툭툭 던져 진실함을 표시하며, 그 틈을 잘 이용해서 자기의 의사를 통하는 것이 중길의 아첨이다. 신발이 닳고 자리가 떨어지도록 쫓아다니면서 남의 입술이나 쳐다 보고 얼굴빛이나 살펴보고 말마다 “옳습니다.” 하고 일마다 “훌륭합니다.” 한다면 첫번 들어서는 기쁘다가도 오랜 뒤에는 싫증이 나고 싫증 끝에는 비루하게 생각되어 도리어 자기를 놀리지 않는가 하고 의심케 될 것이다. 이것이 아랫길의 아첨이다. 

대체 관중이 아홉 번이나 여러 나라의 임금을 연합시켰고 소진이 여섯 나라를 한데 뭉치게 하였으니 천하의 큰 교제군이라고 할 만하구나. 그런데 송욱과 탑타는 길가에서 빌어먹으며 다니고 덕홍은 거리 가운데서 미친 채 노래 부르건만 오히려 말거간의 방법은 쓰려고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점잖은 사람으로서 글을 읽는 선비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