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그저 내 이야기 같은 곡
이춘아
2020. 8. 16. 07:43
‘그저 내 이야기 같은 곡’
고백하자면, 처음엔 이 곡을 정말 좋아했었다. 초등학교 4학년 겨울, 모 음악캠프에서 같은 방을 썼던 대학생 언니가 “너는 무슨 곡을 제일 좋아해?” 하고 질문했을 때 주저 없이 이 곡을 대기도 했었으니. 내 대답을 들은 언니가 “난 그런데 협주곡 3번이 더 좋아”라고 했고, 그 곡을 아직 몰랐던 나는 “이 곡보다 더 좋은 음악도 있을 수가 있어요?” 했다.
그러나 막상 스무 살을 넘겨 스무 곡이 넘는 협주곡을 배운 상태가 되었는데도, 이 곡은 ‘아직’이었다. 그 겨울엔 알지도 못했던 협주곡 3번을 배우게 되었을 때까지도 .... 아무 의도도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글쎄... 따지고 보면 내가 다닌 한국예술종합학교 피아노과의 3분의 1이나 되는 사람들도 이 곡만큼은 자다 일어나서도 칠 정도에 루빈스타인, 아슈케나지, 리히터, 라흐마니노프 본인 등등이 녹음한 여러 좋은 음반들에 이미 충분히 겨웠던 게 아닐까. 게다가 이 곡을 아무 ‘사적인 감정’없이 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피아니스트라는 점도 가끔 기분 좋게 느껴졌고...
물론 그 순수의 시대는 끝이 뻔한 길이었다. 그 어떤 설문조사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피아노 협주곡’ 1위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 그만큼 모두가 언제라도 듣고 싶어 하는 곡, 그리하여 피아니스트라면 특별한 신념으로 거부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연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결국 나도 2008년 모 오케스트라로부터 제의를 받고 그 운명에 순순히 응했다.
문제는 그 결과가 조금 이상했던 것. 악보를 처음 편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지고지순하게 흠모해온 곡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가장 거슬렸던 점은 차이콥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 을 그대로 베껴놓은 것 같은 구조였다. <교향곡 1번>의 실패로 와신상담을 한 결과가 이것? 좀 비겁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고 보니 특유의 최루성 선율과 화성은 “제발 날 좀 사랑해줘” 하고 구걸하는 듯했고, 마침 독일로 유학간지 얼마 안 되어 슈베르트와 슈만에 푹 빠져 있던 때라 채식만 하다 갑자기 고기를 먹은 듯한 더부룩함까지... 게다가 당대 최고 피아니스트의 작품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기저기 부자연스러운 무브먼트투성이... 상대적으로 음표가 3만 개라고 알려진 <피아노협주곡 3번> 은 오히려 익숙해지면 손이 알아서 다음 음을 짚게 될 정도로 그 움직임이 자연스러운 반면, 이 곡은 아무리 해도 영 손에 잘 붙지가 않았다. 그많은 사람들이 어쩜 다들 그렇게 잘 치는지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로.
급기야 맨 마지막 코다가 <피아노협주곡 3번>이나 차이콥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처럼 오케스트라와 함께 멜로디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멜로디를 반주하는 모양새마저 짜증이 났다. 일설에 의하면 호로비츠도 이 점이 싫어서 이 곡을 끝끝내 안쳤다는데... (그 얘기를 들은 라흐마니노프는 당신이 원하다면 멜로디를 함께 쳐도 상관없다고 하자그건 싫다 했단다).
진짜 문제는 오케스트라와의 조화였다. 박자가 수없이 바뀌는 데다 오케스트레이션(악기의 구성)이 워낙 두텁다 보니 피아니스트보다는 지휘자의 권한이 클 수밖에 없는 곡이었다. 혼자 열심히 구상해간 곡의 구성은 리허설 한 번에 산산조각이 났고, 오케스트라에 질질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의 연주를 끝으로 다짐했다. 앞으로 이 곡은 웬만하면 피해가리라. 그 후로 이 곡을 연주하자는 제의가 올 때마다 별 핑계를 다 댔다. <피아노협주곡 3번>이나 <파가니니주제에 의한 광시곡>은 어떠냐, 러시아 협주곡이 필요하다면 차이콥스키나 프로코피예프는 어떠냐, 이 곡 말고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등등. 몇 년 동안 용케 요리조리 피했다. 그러던 중 재작년 즈음에 받은, 놓칠 수 없는 음악회 두 건. 그런데 다른 곡은 안 되고, 무조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이란다. 운명이란 괜히 운명이 아닌가 보다.
다시 꺼내든 악보, 역시나 불편했다. 테크닉적인 것보다는 시도 때도 없이 울컥하는 그 내용이 참으로 요리하기 까다로운 탓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보니 차이콥스키 협주곡의 형식을 조금 차용했다고는 해도 훨씬 완성된 형태의 구조임이 보였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이 선율과 화성은, 세기의 그것이 아니던가. 이렇게 마음을 조금 다스리며 한밤중에 혼자 느린 부분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또 열이 오르고 말았다. ‘대체 몇 번을 울컥하는 거야?!’ 그러곤 잠시 후, 우습게도 내 심장이 나도 모르게 음악에 따라 울컥하는 걸 느끼고 만 거다.
문득 떠오른 또 하나의 기억. 예전에 한 독일 피아니스트 친구가 ‘싸구려 감상주의 음악’이라며 라흐마니노프 협오증을 자랑하듯 말하기에 집에 돌아와 혼자 이 곡을 들으며,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면 이런 음악을 안 좋아할 순 있어도 들을 때의 벌렁거리는 심장은 숨길 수 없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던 것이.
딱 그 느낌이었다. 몸이 머리와 마음하곤 상관없이 반응하는 기분. 심장은 열려버린 듯, 머리는 비어버린 듯, 슬픈건지는 모르겠는데 언제부턴가 눈물도 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 내 허락은 전혀 필요 없는 듯 어느새 나에게로 성큼 다가와 있는 음악. 그래서 다른건 모르겠고, 그저 내 이야기 같은 음악. 어떤 소설이 분명 남 얘기인데도 마치 내 얘기인 것만 같듯, 아련한 유년의 기억, 상처를 극복한 기억, 애잔한 사랑의 추억, 무엇이 되었든 내 이야기 같은 음악. 가만 보니 이건 그런 음악이었다. 그래서 거꾸로 만인의 연인인 걸까.
그렇게 내 마음은 다시, 슬쩍 열렸다. 물론 한 번 열렸다고 단번에 예전처럼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하게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 후엔 이 곡을 연습하다 말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을 견디지 못해 울어버렸고, 몇 달 후엔 무슨 곡을 연주하고 싶으냐고 물어온 모 오케스트라에 이 곡을 내밀었다. 연주하다 보면 내 마음에도 없었던 어딘가로 자꾸 나를 데려가는 이 곡, 다음번엔 어디로 나를 데려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