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이춘아
2020. 8. 29. 05:52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작품을 연주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작품과 함께하지 않으면 우리 삶의 의미마저 사라지는 듯한 것을 뜻한다.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느라 밥 먹는 일마저 잊어버리는 것이며, 손가락이 몹시 아프고, 밤에도 연습을 하기 위해서 문득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나의 몸 안에서 음표들이 펄떡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며, 열광이 나의 몸을 휘감는 것을 뜻한다.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을 전적으로 작품에 내어주는 것을 뜻한다.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지혜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고 오직 열망만을 믿음과 토대로 삼아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내 앞에서 앙리 바르다 교수님은 이 곡을 어느 누구와도 다르게 연주해 보였다.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그의 손가락 아래로 무수히 많은 세계가 펼쳐졌다. 연주를 하는 그는 교수가 아니라 창조자로 변했다. 그리고 그런 그가 낭시에서 여는 하계연수에 나를 받아주기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수에서 주도하는 신인 독주가를 위한 활동에도 참가해서 연주회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직관을 따라야 하며, 나 자신에게 최대한 충실하고 솔직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신념을 확인시켜주었다. 그가 내게 준 것은 새로운 희망이었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솔직하게 들려주고 드러냄으로써 이해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나는 나의 행운의 별에 대한 믿음을 새로이 했으며,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하는 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정진할 용기를 얻었다.
나는 혼자서 지난 몇 년 동안 나의 학습과정에서 자양분이 되어주었던 것들에 집중했다. 음악에 나 자신을 맡길 때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느껴지는 희열, 음악을 연주하는 순수한 기쁨. 그 기쁨을 오늘 나는 심사위원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나의 기쁨이 그들의 기쁨일 것이라고 짐작했으니까. 지금 내가 두려움에 떨고 있지는 않은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음악을 나눌 경이로운 자리에 대한 기대에 덮여버렸다. 왜냐하면 나에게 이 순간은 입학을 위한 치열한 콩쿠르를 넘어서 심사위원들과 내가 예술에 대한 사랑 속에서 함께 자리하는 시간이니까. 그들에게 내가 경험한 천국과 지옥, 피아노와 내가 하나가 될 때 결국 창조되어 나오는 결정체를 관능적으로 보여주는 시간이 되리라는 기대감.
그날 나는 그들에게 단순히 연습에 바쳐진 무수히 많은 시간들, 지칠 줄 모르고 반복해온 곡들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열정, 안양에 살던 어린 소녀, 콩피에뉴의 사춘기 소녀를 송두리째 내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나를 항상 목마르게 하던 갈증, 어렸을 때부터 더할 나위 없이 단순하게,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세상의 빛이 되겠다고 말해온 나의 꿈을 피아노를 통해 고백했으며, 내 마음 안에 일어났던 지진, 두려움, 엄마의 기대, 마르크 오플레 선생님의 무한 신뢰, 앙리 바르다 교수님이 베풀어준 은혜, 루앙 피아노 담당 교수님에 대한 분노, 중학교 교장 선생님의 전폭적인 지지, 경찰청에서 내가 보인 당돌함, 그리고 음악에 대한 나의 사랑을 전부 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