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아 2020. 11. 7. 23:15

성지순례라는 현상은 이미 그리스도 이전에도 있었다.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는 사람들이 무리 지어 다니며, 신의 치유를 체험할 수 있고 신의 명령을 신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곳들을 두루 찾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병을 고치려고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을 찾아갔다. 또한 아폴론의 신전들을 순례하며, 자신의 현세와 미래에 대한 교시, 일상에 대한 방편을 얻으려 했다. 사람들은 신들이 특정한 장소에서 특별한 효력을 발휘한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길을 떠나 고난을 감내하며, 기도와 고행을 통해 순례지의 성역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성인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에서 밤을 지내고는 한다. 잠든 사이 하느님의 계시를 보거나 성인의 치유력을 나눠 받기를 기대한다. 종종 사람들은 성인의 유해나 그 무덤에 놓인 천 조각을 얻어 길을 떠나며 일상에서도 하느님의 보호를 체험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어떤 이유로 모든 종교가 특정 장소로 성지순례를 행하는지 묻는다면 그 답은 인간 영혼에 있다. 인간은 신을 자신이 가진 상에 따라 상상한다. 인간은 신이 특정 장소를 선호하는 것처럼 신도 몇몇 장소를 선호할 것이라 생각하며, 그곳에서 신이 특별히 현존하고 영향을 미칠 것이라 기대한다. 인간은 그 영향력에 참여하고 싶어 하며, 이에 신이 나타난다고 알고 있는 장소로 순례를 떠난다.

성지순례의 주요 동기는 하느님을 일상에서 만나는 것보다 더 분명히 만나고자 하는 소망, 그리고 그것이 특정 장소에서 가능하리라는 믿음이다. 다른 동기로는 구체적 소원에 대한 청원, 계시를 얻고 영적으로 굳건해지리라는 희망, 순례지에서 치유되리라는 신뢰가 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타인의 죄를 속죄하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순례에 나선다. 더 나아가 성지순례는 기도의 집약이고, 육과 영으로 바치는 기도이며, 고된 여정을 통해 입증되는 기도, 엄한 고행을 통해 지지되는 기도이다. 성지순례는 자연을 거닐거나 여행을 떠나듯이, 그리 단순하게 떠나는 게 아니다. 순례자들은 우선 특별한 예식을 치르고 축복을 청한다. 그리고 순례 지팡이와 순례 보따리에 축성을 받는데, 그것들이 동행하며 그들을 지켜 줄 것이다. 그들은 성지로 나아가는 동안 기도를 바치며, 그 기도로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한다.


-안셀름 그륀, [길 위에서], 분도출판사,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