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시적 풍경과 회화적 풍경

이춘아 2020. 12. 6. 07:11

박은영, [풍경으로 본 동아시아 정원의 미 ], 서해문집, 2017.

‘시적 풍경과 회화적 풍경’

한국의 큰 주택에는 담장 안에 사랑채와 별도로 정자가 있기는 하나, 일반적으로는 주거 공간으로 살림집이 모여 있고 그 꾸밈새도 미미하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언덕이나 앞산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공유하는 정자가 있는데, 이는 사회적인 공간으로 한국에서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특별한 양식이다. 이 책에서 한국의 정원을 원정이라고 한 것은 주택에 부속돼 있는 가원과 마을의 정자를 아우르는 넓은 공간을 담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본격적인 논의는 되지 않고 있다. 용어는 항상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야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다. 나는 세 나라의 원을 중국은 원림, 한국은 원정, 일본은 정원으로 구별하려고 한다. 공간적 문화적 국가적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일일이 구별해야 할 때 의미의 혼란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림의 아름다움은 진정 어떤 것인가? 어떤 눈으로 봐야 원정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는가? 그러한 미적 체험은 어떤 경로로 얻어지는 것일까? 이 책에서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미와 미적 체험은 본질적으로 주관성과 객관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개인적 시각과 경험과 지식에 의존하는, 말하자면 주관적인 의미의 대상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여러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즉 방법과 경로가 같으면 동시에 같은 결과를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인 관념의 대상이기도 하다. 정원의 아름다움에서도 그러한 양면성이 그대로 나타난다. 이 책에서는 어떤 시각으로 정원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가 하는, 일반적인 눈높이에서 원정의 자연미와 미적 체험의 본질을 말하고자 한다. 그 출발은 자연을 바라보는 두 풍경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문학적 상상을 통해 형성되는 시적 풍경과 그림으로 채색되는 회화적 풍경이다.

조선시대 정조의 업무 일기라 할 수 있는 [일성록]에는 이른 봄 내원, 즉 지금의 창덕궁 후원이 비원에서 꽃과 낚시를 즐기는 봄맞이 연회 상화조어연에 대해 소상하게 적혀 있다. 때는 1795년 3월 10일, 왕은 영화당에 나아가 신하를 부른다.

올해는 천년에 한 번이나 있을 만한 경사스러운 해이니,
무릇 경사를 빛내고 기쁨을 나타내는 것에 내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해마다 꽃을 감상하고 낚시를 즐기는 놀이를 할 때면 각신의 자질을 불러 들어오게 하면서 단지 아들과 아우와 조카만 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재종과 삼종까지 불렀으니 이 또한 보다 많은 사람들과 즐거움을 누리려는 뜻을 담은 것이다.

날이 어슴프레해진 뒤에 신하 및 유생과 식사를 하고 왕이 이르기를 “작년에 여기 와서 놀 때에는 밤까지 계속해서 소루에서 지은 시도 있고, 배 안에서 그리고 물가와 언덕에서도 지은 시가 있으니 오늘도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하며 흥을 돋운다.

마침내 달이 뜨기를 기다려 태액지에 배를 띄워 신하와 함께 연못을 돌며, 때로는 작은 섬에 내리기도 한다. 배에는 밤이슬의 촉촉한 기운이 감돌고, 수면에 비치는 흔들리는 등불은 마치 뭇별이 반짝거리는 밤의 선계와도 같다. 느린 [어부사]가 배에서 흘러나오고 생황과 피리가 노래와 어우러진다. 왕이 드디어 오언근체시를 짓는다. 이에 신하가 화운해 시를 짓고, 배에서나 작은 섬에서나 각기 운을 집어내 시를 짓는다. 왕이 야금을 풀어 정원 잔치는 더욱더 깊은 밤을 이어간다.

머물러 제군과 술을 마시니
어느덧 달이 한 장대쯤 떠올랐네
오늘 밤처럼 좋을 수 없으니
이런 태평의 기쁨을 함께 즐겨서일세
꽃은 천 겹의 나무 속에 빛을 내뿜고
등불은 아홉 굽이 난간에 걸리었네
금오는 덩달아 통금을 개방하니
화기가 장안에 두루 퍼지누나

시는 당시 왕과 신하를 연결하는 중요한 소통 수단이었고, 선비는 일상에서 시를 통해 감성을 가다듬었다. 나아가 시를 자연이라는 외부 세계를 다양하게 인식, 표현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지금도 창덕궁 후원, 특히 옥류천 부근의 누정에는 주련과 경물에 역대 왕의 어제시를 포함해서 주변의 풍경시가 많이 남아 있어, 당시 시인의 마음으로 지금의 옥류천 풍광을 조용히 바라볼 수 있다.

주련을 읽으면 시인의 눈으로 마음속의 풍경을 연상하게 된다. 시인은 바라보는 대상을 시적으로 표상하기 위해 시에서 어느 한순간 읽어낼 수 있는 분위기를 살아 움직이는 ‘동적’ 요소로 강조해 신선한 느낌을 전달하려고 한다. 청의정 주련에는이슬과 구름, 물고기와 꾀꼬리가 함께 뛰어노는 장면이 묘사돼 있는데, 그 고요한 공간이 보는 사람에게 순간 살아 움직이는 풍경으로 다가온다.

신선의 이슬은 길게 요초에 푸르게 맺혔고
고운 구름은 깊이 옥지를 곱게 감쌌네
물고기는 물결 위에 뛰어 때로 첨벙거리고
꾀꼬리는 짙은 나무에 들며 오래 서성거리네

시인은 시에서 온갖 잡새를 불러 모을 수도 있고, 봄날 꽃잎을 휘날리다가 곧바로 돌아서서 고요한 겨울밤 외로운 달빛 속으로 마음을 돌리게 할 수도 있다. 이렇듯 시인은 계절이라는 시간을 마음대로 불러온다. 그러나 화가는 화폭에 그렇게 그릴 수 없다. 화가는 대신 공간을 뛰어 넘을 수 있다. 구만리 머나먼 하늘을 날아 장강가에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복숭아 언덕 초가를 마음대로 그릴 수 있다. 시인은 계절을 수시로 넘나들 수 있고, 화가는 장소를 자유롭게 드나든다.

시적 풍경은 시를 통해 상상력이 불러오는 새로운 풍경이다. 회화적 풍경은 그림을 통해 화가가 만들어내는 또 다른 풍경이다. 이 양자는 보는 자와 읽는 자에게 새로운 미적 대상을 접하게 한다. 원림미는 그러한 두 풍경이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그 이미지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과정 속에서 인식되는 미적 체험이다. 옥류천 누정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시인이 말하는 시적 풍경과 화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림 같은 풍경이 동시에 두 얼굴로 겹쳐져 있다. 이 책에서는 시와 그림이라는 두 얼굴을 통해 세 나라 정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