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페미니즘, 고통에 말을 걸어주는 행위

이춘아 2020. 12. 12. 06:11

이은하, [페미니스트 비긴스], 도서출판 오월의봄, 2020

‘페미니즘, 고통에 말을 걸어주는 행위’

연민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가 부족했다. 이거구나, 하고 무릎 칠 언어가 부재했다. ‘때려서라도 훈육한다’는 사회풍토가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고통을 목격하는 걸 힘들어하던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누가 때리고, 누가 맞는가. 권력 구조를 문제 삼고 싶었다는 걸 깨달은 건 꽤 시간이 흐른 후였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페미니스트가 된 후, 동그랗게 원 모양으로 만들어진 강의실 책상 안쪽에 가지런히 놓인 의자에 앉아, 이중 삼중의 짐을 등에 얹고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듣고 있노라면, 선생님에게 심하게 맞던 친구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불법촬영물 피해자를 인터뷰하던 순간에도 친구의 모습이 그 피해자의 얼굴 위에 어른거렸다. 

폭력 피해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오랜 시간 만나오면서, 이들을 힘들게 한 권력 구조가 여간해서 꿈쩍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압사 직전까지 짓눌러 숨통을 끊어버리게 할 수 있는 위력은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줄 때 비로소 바뀌는구나,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고통에 말을 걸어주는 행위다. 여성학자 벨 훅스가 말한대로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것이며, 그러하므로 모두의 행복을 향해 달린다. 

자신의 고통을 넘어서 다른 이의 아픔에 말을 걸어준 다양한 페미니스트의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해 책을 썼다. 말하자면 페미니스트들의 생애사다. 이들이 아팠던 이유는 남성 중심 사회와 맞닿아 있다. 이들은 어떻게 고통을 극복해갔는가. 그리고 사회에서 촉발된 아픔에 침묵하지 않고 발화한 여성들에게 어떻게 말을 걸며 나아갔는가. 독자들은 한국사회를 강타한 여러 종류의 여성 문제들을 인터뷰이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목격하게 될 것이다. 

책을 쓴 이유는 분명하다. 메갈리아 논쟁과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인증. 뒤이어 발생했던 강남역 시위, 미투운동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 격발이라고 불리는 시대에, 페미니즘이 무엇이며 어떻게 누군가의 삶과 세상을 바꾸는지 생각해보고 싶었다. 더 나아가 지난 30년간 페미니즘이 다룬 이슈를 페미니스트의 삶을 통해 그려내고 싶었다. 말하자면 페미니즘의 지형도를 만드는 거였다. 하지만 퀴어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했다. 이 한계는 다음번 과제로 남긴다.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를 부탁한다. 

바쁜 일정에도 인터뷰에 응해준 일곱 명의 인터뷰이
고은영, 박이경수, 유숙열, 양지혜, 이효린, 장하나, 조주은에게 감사하다. 이들은 나이도, 살아온 환경도 다르다. 다만 이들을 페미니즘으로 이끌고 간 어떤 공통의 강력한 동기가 있었다. 그들이 서 있던 환경에 따라 차이는 있었으나, 바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성으로서의 경험이 그들을 페미니즘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여성으로서 겪은 그 고통스러운 경험들이 페미니즘과 만나 세계를 바꾸는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었다. 이들에게 페미니즘은 타인의 고통에 말을 거는 일이자, 지배의 언어를 바꾸는 일이었다. 이들이 뿜어내는 강한 에너지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1장: 엄마를 위한 변명
        유숙열
2장: 직업이 페미니스트일 수는 없을까
        이효린
3장: 다가가기 편한 언니로 남고 싶어요
        박이경수
4장: 죽고 사는 걸 고민했던 사람들이 정치에 나서야 해요
        장하나
5장: 너의 절망과 나의 절망이 연결될 때
        양지혜
6장: 이주민 여자가 페미니스트 정치인이 된 사연
        고은영
7장: 페미니즘은 나의 일용할 양식
        조주은

고통에 침묵하지 않고 세상에 균열을 내온 페미니스트 7인의 이야기

유숙열/ 문화미래 이프 공동대표
“페미니즘은 배우면 실천할 수밖에 없어. 내 얘기니까. 자기 생활에 직접 연결시키지 않으면 못 견딜 거야. 그 자체가 그러니까.”

이효린/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사무국장
“옛날보다 남성 권력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고 투쟁적으로 바뀐 측면도 있어요. 그래도 바꾸고 싶지는 않아요. 나는 지금의 내가 좋습니다.”

박이경수/ 대전여민회 사무국장
“내가 만약에 여성운동가가 되지 않았다면 소소하게 만족하며 사는 성격이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사고하는 사람이 됐어요.”

장하나/ 정치하는 엄마들 사무국장
“제가 보기에 페미니즘은 당한 놈이 안 당하려고 하는 거예요. 여자들이 애 낳고 완전 쪽박을 차잖아요. 그러니까 ‘부당하다’ ‘바꾸자’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죠”

양지혜/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공동대표
“함께 절망했기 때문에 두렵다는 감각조차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그래서 무너지지 않고 일어날 수 있었고요. 더 연약한 사람을 바라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서로 눈물겨워하면서도 계속해서 말하는 걸로 스쿨미투를 이어올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고은영/ 전 녹색당 제주도지사 호보
“기성 정치나 운동에서 채택한 언어는 여성의 언어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싸우고 있어요. 그게 생태, 동물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조주은/ 경찰청 여성안전기획관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면 다 해결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여자들의 육아 모두 여성 몫이었어요. 여자들을 성적 존재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사람으로만 받아들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