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이 길을 모두 택하지 않았다
이춘아
2021. 1. 16. 07:23
율곡 이이(1536~1584)의 위대함은 자기 시대의 문제점을 긴 눈으로 내다보고, 온 몸을 던져 고치려고 노력한 선각자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어렵거나 더러운 것이 있으면 거기에 편승해 물들어 사는 방법이 있고, 현실을 피해 초야에서 혼자 깨끗하게 사는 길도 있으며, 그것이 아니면 기성 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혁명적 도전도 있는데, 율곡 시대의 선비들은 대체로 이 세 길의 하나를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율곡은 이 길을 모두 택하지 않았다. 벼슬하면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직언하여 위로부터의 개혁, 곧 경장을 끌어내고자 했으며, 물러나서는 자신의 몸을 더욱 깨끗이 닦는 학문에 집중하면서 후학을 길러 이 땅의 성리학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성학집요]를 대표로 하여 [동호문답], [격몽요결],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친 [만언봉사]의 개혁안은 후대에 큰 영향력을 미친 명저들이다.
양반과 상민이 점차로 분화되고, 서얼차대가 심화되던 시절에 율곡이 보여준 따뜻한 포용력과 애민 정신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독서에 의해서만 인간성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성장기의 체험이 인격 형성에 영향을 준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어머니 사임당의 감화를 간과할 수 없다.
율곡은 천품이 착하고 영리했으며 과거 시험에 아홉 번이나 장원으로 급제할 만큼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인물이었지만, 인간적으로 본다면 소년기의 율곡은 거의 죽고 싶은 충동을느낄 만큼 심각한 심리적 갈등도 겪었다. 과거 시험 합격도 단번에 된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도전 끝에 성공한 것이었다. 청소년기의 율곡은 결코 정신적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태어나서 6년간 외가에서 자랐고 어머니 사임당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일생의 절반을 남편과 떨어져 지내면서 홀어머니를 그리워하고 봉양하며 살았던 사임당의 애절한 눈물을 수없이 목도했다. 50세까지 벼슬을 얻지 못하고 한량처럼 지냈던 아버지 이원수의 존재는 사임당에게나 율곡에게나 버거운 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학문과 덕성을 겸비하고 여기에 예술적 재능까지 갖춘 어머니 사임당은 단순한 어머니가 아니라 존경하고 연모하는 우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율곡의 감정이 어떠했는가를 보여 주는 비극적인 사건은 바로 16세에서 20세 사이에 일어났다. 16세에 아버지를 따라 평안도에 다녀오느라 임종도 지켜보지 못한가운데 어머니를 잃은 율곡은 심한 정신적 허탈감과 갈등에 빠져 19세에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가출하여 1년간 금강산의 승려가 되었다. 당시 생불이 나타났다는 소문까지 퍼질정도로 불교에 깊이 중독된 그의 승려 생활은 율곡의 일생 중 가장 가슴 아픈 상처로 남았다.
율곡이 뒷날 인간의 칠정을 이와 기의 통합체로 보면서 성선설에 무게를 더 많이 둔 이면에는 두 가지 원인이 감지된다. 하나는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두려움과 욕망을 다양하게 체험하면서 살아온 자신의 정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개과천선의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을 참선비이자 성인으로 이끄는 채찍으로 삼으려는 마음이 담긴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율곡이 평생을 두고 자신의 지난날 과오를 토로하면서 참회하는 자세를 한시도 버리지 않은 것에서 그런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또 하나의 원인은 모든 사물을 대립과 갈등으로 보지 않고 원융과 통합으로 바라보려는 불교의 세계관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듯하다. 그가 불교를 버리고 유학으로 돌아온 것은 현실을 가환으로 보려는 불교의 비현실주의를 버린 것이지 우주를 포용적 조화 관계로 보려는 통합적, 상생적 세계관마저 버린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불교의 영성으로 자신의 마음의 때를 씻고, 유교의 이성적 지성으로 현실 세계의 때를 벗기고 이상사회로 이끌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사상사를 공부하면서 나는 넘어야 할 큰 봉우리가 두 개 있다고 믿었다. 조선 왕조의 건국을 설계한 삼봉 정도전이 하나의 큰 봉우리이고, 늙고 병든 조선 왕조를 혁신하여 왕조의 수명을 연장시키려고 노력한 200년 뒤의 율곡이 또 하나의 큰 봉우리다. 정도전을 모르면 조선 전기를 이해할 수 없고, 율곡을 모르면 조선 후기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