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도덕적 자기 완성의 길
이춘아
2021. 1. 17. 07:30
여섯 살 때 율곡은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돌아와 외할머니가 수진방에 마련해 준 집에서 머물렀다. 이때부터 율곡은 어머니로부터 경서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사서와 여러 경전에 스스로 통달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치는 것이 상례이지만, 그 상식을 깨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머니의 학식이 아버지를 능가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자식 교육에 관심이 적기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 두 가지 이유가 모두 해당되는 듯하다.
율곡은 여덟 살 때 파주 화석정에 올라 시를 지었는데, 화석정은 5대조인 이명신이 지은 것으로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는 풍광이 아름다운 정자였다.
숲 속 정자에 가을은 이미 저무는데
시인의 마음은 끝이 없구나
멀리 강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붉었네
산은 외로이 둥근 달을 통해 내고
강은 만 리의 바람을 품었네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지
저무는 구름 속에 울음소리 끊어지네
율곡은 13세(1548년, 명종 3년)에 서울에서 진사 초시에 해당하는 진사해에 급제했다. 율곡이 어린 나이에 급제한 것이 기특하여 승정원에서 불러 보니 동년배의 다른 급제자는 자못 뽐내는 태도를 보였으나 율곡은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아 그가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그런데 초시만 급제하고 그만 두었기 때문에 진사가 되지는 않았다. 아마 부모의 권유로 자신을 시험해 본 것으로 보인다. 15세 되던 해 여름에 아버지는 드디어 음직으로 수운판관이라는 벼슬을 얻었는데, 지방에서 바치는 세곡을 서울로 운반하는 조운을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이때 아버지의 나이는 쉰으로서 당대의 권력자인 당숙 이기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벼슬을 얻은 다음 해, 율곡이 16세 되던 해 봄에 삼청동 우사로 이사했다. 우사는 관리들이 임시로 빌려 사는 집을 말한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두어 달 뒤인 5월 17일에 율곡은 어머니를 여의는 슬픔에 빠졌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것이 율곡을 더욱 아프게 했다. 율곡은 아버지가 수운판관의 일로 평안도에 갈 때 큰형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갔는데, 배를 타고 서울의 서강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의 부음을 접하게 되었다.
율곡이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된 동기에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동기로 보기보다는 그 주장들이 모두 옳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지나쳐 세상사를 잊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 사람이 정신적으로 큰 충격에 빠졌을 때 종교에 귀의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율곡의 경우 귀의할 종교는 당시로서는 불교밖에 없었으며, 아무리 불교를 이단으로 비판하는 유학자라도 불교가 심성을 연마하는 데 일정한 도움이 되다는 것을 부인한 학자는 없었다. 특히 16세기 후반의 성리학 사조는 심학에 기울어져 있어서 선학을 용납하는 풍조가 있었던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다만 율곡이 승려가 된 것만은 성리학자로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이단아의 길이었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율곡은 만년에 선조 임금의 왕명으로 [김시습전]을 썼다. 여기서 유학자로서 승려가 된 김시습의 재능과 문장을 격찬한 데서도 그가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율곡은 불교를 이단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율곡의 저서 가운데 [순언]이라는 책이 전해지고 있는데 [율곡전서]에는 빠져 있지만 율곡의 사상을 엿보는 데 참고가 된다. 이 책은 노자의 [도덕경]을 유가의 입장에서 해석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수심의 측면에서 유가와 도가가 서로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율곡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자이지만, 심학의 측면에서는 불교의 선학이나 노자의 무위자연의 사상을 성리학과 절충하는 입장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23세 봄에 율곡은 성주 목사인 장인을 찾아갔다가 강릉으로 돌아오는 길에 예안의 도산에 들러 퇴계 이황(1501~1570)을 예방하고 학문의 길을 물었다. 당시 퇴계는 율곡보다 34세의 연상인 57세의 원로로서 영남 성리학의 거장이었으므로 많은 문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율곡을 보고 사람됨이 명랑하고 시원스러우며 똑똑함에 놀라 “후생가외(제자가 두려움)라는 성인(공자)의 말씀이 나를 속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퇴계와의 인연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서찰을 통해 이기설에 관한 논변을 주고받았는데, 퇴계가 율곡의 설을 좇아 자신이 지은 [성학십도]의 순서를 수정하기도 했다. 뒷날 두 사람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각각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서로 토론하고 경쟁하면서 성리학을 발전시켜 나갔고, 때로는 경쟁이 지나쳐 남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당쟁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진지한 사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28세에 아버지 탈상을 마치고, 29세에 명종 19년(1564년)에 이르러 율곡은 과거 시험에 대한 회한을 한꺼번에 풀었다. 생원과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어 같은 해 식년 문과에도 급제했다. 생원과 진사시는 초시와 복시에서 장원하고, 문과 시험에서는 초시, 복시, 전시에 모두 장원하여 일곱 번 장원했는데, 거리의 아이들은 율곡이 탄 말을 둘러싸고 ‘아홉 번 장원한 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마도 13세 때 진사 초시에 급제하고, 23세 별시 초시에 장원한 것을 합쳐서 부른 것이거나 아니면 일곱 번 장원을 듣기 좋게 아홉번 장원으로 바꿔 불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삼아 마음을 다잡고 시험에 임한 결과로 보인다. 29세에 문과에 급제한 것은 그의 천재성에 비추어 본다면 빠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 대신 합격 증서를 3개나 받았으니 요샛말로 하자면 3관왕에 오른 셈이 되었다.
율곡은 18년간 조정과 향리를 오가면서 간헐적으로 벼슬살이를 이어갔는데, 동인과 서인의 분당이 나타난 1575년(선조 8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율곡이 수시로 벼슬을 버리고 파주, 해주의 석담 등지로 은거한 것은 선조가 율곡의 말을 옳게 받아들이면서도 실천을 게을리하고 개혁을 두려워하여 율곡을 실망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조의 입장에서 보면 율곡이 비록 충성스럽고 똑똑한 선비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의 언사가 너무 과격하고 개혁에 대한 열망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그를 견제하고픈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를 가지면서 숨바꼭질을 하듯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율곡의 말년은 정치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였다. 동인으로부터 서인파의 영수로 지목되어 맹렬한 비판에 시달렸는데, 특히 세상을 떠나기 전 1년간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다. 율곡을 존경하면서도 그의 경장을 받아들이지 않던 선조가 오히려 이때에는 동인의 치열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율곡을 적극적으로 비호하여 끝까지 지켜 주면서 병조 판서와 이조 판서의 중책을 맡겼다. 이는 그에게 군정과 인사권에 관한 경장을 위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선조는 율곡의 경장 이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던 세금 문제, 곧 공안과 선상의 민생 문제는 끝까지 실천하지 않았다.
율곡이 우리에게 남겨 준 교훈을 크게 두 가지로 보고자 한다. 하나는 자기 시대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개선하려는 치열한 정열과 정신이다. 그 정신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도덕을 바탕으로 한 경장만이 살 길이라는 부르짖음일 것이다. 경장은 기성 질서를 그대로 지키려는 수구도 아니고 기성 질서를 송두리째 바꾸려는 혁명도 아니다. 기성 질서를 큰 테두리에서 그대로 지키면서 시의에 맞지 않은 문제를 과감하게 고쳐 민생을 향상시키고 국가를 강하게 만드는 일이다. 말하자면 온건한 중도적 개혁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 인간의 도덕적 자기완성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우리 사회가 오늘날 요구하는 가치관도 크게 보면 이런 범주를 벗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율곡이 남긴 또 하나의 교훈은 사물을 대립과 갈등으로 보지 않고 통합과 절충을 존중하는 세계관이다. 형이상의 이(理)와 형이하의 기(氣)를 대립으로 보지 않는 그의 이기론이 그렇고, 여기서 파생된 인성론 또한 선악에 대한 엄격한 양분론을 거부하면서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신분 차별에 대한 거부감이 나타난다. 이런 세계관도 오늘날 극한적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경고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