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나의 삶과 예술이 하나로

이춘아 2021. 2. 6. 00:39

김미루, [問道禪行錄문도선행록], 통나무, 2020.


우리에게 사막은 종종 죽음의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다. 모든 생명의 원천인 물이 고갈되어 살 수 없는 곳! 사막을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우선 두려움에 물러선다. 방향을 상실하거나, 가혹한 폭염과 목마름에 고생하거나, 모래바람에 묻히거나, 전갈이나 뱀에 물리거나 하는 이미지에 압도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의 관념 때문에, 사막은 종종 영적인 공간으로서 인식되기도 한다. 서양의 종교, 성자들이 모두 이 사막에서 나왔다. 모세도, 예수도, 세례 요한도, 무함마드도 다 사막에서 절대자의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죽음이 지배하는 이 광막한 “빔”의 공간에 대하여 무언가 낭만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한 것이다. 그대의 실존의 고뇌나 기억들을 뜨거운 바람과 함께 다 망각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 “빔”의 장소, 고통을 겪으며 겪을수록 신성해지는 장소, 그러한 곳으로 승화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세상에는 사막에 관한 셀 수 없이 많은 책과 영화들이 있다. 한 아리따운 여인이 남편이 죽은 후에 캐러밴을 따라 고통스러운 여행을 하게 된다든지, 파일럿 조종사가 문명에서 격리된 공허한 사막에 추락하여 낯선 환경의 소년을 만나게 된다든가, 한 남자가 그의 사망한 연인을 비행기에 태우고 날아가다가 모래에 쑤셔박혀 결국 로칼 베두인에게 구원을 얻는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사하라사막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사하라는 가장 크고 가장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거기에는 사랑과 죽음과 극단적 수난과 자기발견과 수행과 종교적 계시 같은 것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함장되어 있다.

그러나 세계의 사막은 사하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하라 중심의 사고 역시 서구인들의 좁은 인식의 지평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가급적이면 다양한 사막의 진면목을 체험하고 싶었다. 물론 나 또한 나의 오딧세이를 시작했을 때는 매우 진부한 사고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선 나 자신을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정화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도시의 삶은 과도한 감관의 피로를 강요하고, 의미 없는 인간관계를 계속 엮어나간다. 사막은 나에게 위대한 해독제였다. 매우 평범한 사막의 유목민처럼 고독하게 청춘의 3년을 유랑한 나의 삶은 해독의 한 극단적 실험이었다.

그러나 진실로 내가 사막을 헤매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써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막대한 아름다움이다. 막대함은 숭고함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다. 나의 사진작품은 그 막대한 아름다움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내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램블란트의 원화를 처음 바라보았을 때의 충격! 나는 몇개의 그림 앞에서 멍하니 몇 시간을 배회할 수밖에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칼렌다에 인쇄되어 있었던 그림들을 보았을 때의 느낌과 너무도 달랐다. 인쇄물로써는 화가의 붓질의 느낌, 그 질감의 총체적 아름다움을 흠상할 길이 없다. 사막은 영원히 우리의 분별심을 뛰어넘는 무명의 아름다움을 간직한다. 사막의 아우라는 그대 본인이 직접 사막 한가운데서 느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떠한 매체도 그 광활한 숭고미를 전해주지 못한다.

내가 쓰고자 하는 이야기는 트래블로그 travelogue가 아니다. 그것은 지혜를 갈망하는 모든 자들이 거쳐야만 하는 “벗음”의 여정이다. 사막은 사막마다 유니크한 체험을 안겨준다. 언어가 다르고, 삶의 양식이 다르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세계구성이 다르다. 나는 이 다양한 구성 속에 나의 삶을 융합시키는 어려운 시도를 끊임없이 감행하였다.

사막에는 우리의 일상에서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신비로운 그 무엇이 있다. 계시라면 계시라고도 말할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이 나를 휘감았다. 그러나 사막에서의 해탈의 진정한 의미는 그런 신비니 계시니 하는 것들을 벗어버리는 데 있다. 나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돌아왔을 뿐이다. 똑같은 사람으로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조금 더 슬기로워지고 여유로워졌다. 3년간의 사막의 고행은 나를 보다 온전한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다. 최종적인 소득이라면 나의 삶과 나의 예술이 하나로 되었다는 것이다.

뉴욕의 도시의 삶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나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매우 애처로왔다. 나의 모험을 글로 써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사막에서의 나날을 생각하면 그냥 꿈만 같다. 나는 지금도 조금씩은 더 지혜로워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여행의 전체적 의미를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전체를 안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붓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저명한 소설가 제임스 솔터(1925~2015)가 한 말을 되새기면서: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분명히 온다. 그러나 언어 속에 보존된 그것들이야말로 그나마 진실의 가능성을 보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