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직관을 향한 믿음, 그리고 너그러움
이춘아
2021. 3. 6. 07:50
아녜스 바르다(1928~2019)는 26세에 첫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 이름난 사진가였다. 이후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영화들을 만들었다. 2019년 삶을 마무리하기 전까지 설치/전시 작가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문학과 심리학을 공부하고, 미술사와 사진을 공부한 바르다는 전혀 경험해보지 않았던 영화에 문득 도전한다. 픽션과 다큐를 바르다만의 방식으로 결합한 첫 영화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은 1954년 세상에 나왔고, 그로부터 몇 년 뒤 시작되는 ‘누벨바그’ 영화 운동의 신호탄이 된다. 이후 바르다를 평생 따라다니게 되는 ‘누벨바그의 대모’라는 수식어 역시 이즈음 만들어진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2)는 바르다의 핵심 테마들이 담긴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삶에서 발견하는 여러 모순들,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자각, 다큐적 어법이 담긴 픽션까지 앞으로 펼쳐질 바르다 영화 세계의 진정한 출발이라 할 수 있다.
바르다는 평생에 걸쳐 자기 마음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아티스트였다. 지금 내가 관심이 가는 대상을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럼에도 바르다는 자신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2000)는 거리에서 무언가를 주워 생활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방랑자’는 집도 없이 떠도는 무일푼 소녀, 모나의 이야기다.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그러나 바르다는 그들을 결코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그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회의 여러 다양한 모습들을 환기시킬 뿐이다. 그러면서도 바르다는 형식미 또한 놓치지 않는다. 내용이나 내러티브를 떠나서 그의 영화는 보기에 창의적이고 흥미롭다. 상업 영화의 익숙한 형식적 틀에서 자유롭게 벗어나 심미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2008),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에서 원숙한 바르다를 만난다. 그의 즉흥적인 몸짓 하나, 말 한마디는 이제 그대로 예술이 되고 작품이 된다. 영화를 하고 있거나 다른 예술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는 커다란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고,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따스한 위로와 에너지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제 공식적으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바르다는 언제나 해변에서 그리고 시골 마을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그리고 반갑게 맞아준다.
이 책에는 1962년부터 2017년까지 55년간 바르다가 행한 20편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바르다의 영화를 좋아하거나, 그의 영화로 인해 바르다란 인물에 관심을 갖게 된 이들에게 이 책은 아주 중요하고 값진 텍스트가 되리라 생각한다. 한 독창적인 영화감독의 인터뷰 모음집일 뿐만 아니라 바르다란 아티스트 또는 매력적인 한 인간의 진솔한 자서전으로서도 충분히 기능할 수 있을리란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바르다는 늘 경계에 서 있었다. 스스로 자신을 주변인으로 여겼다. 기존의 방식에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사진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설치 예술로 자연스럽게 새 영토를 개척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바로 지금 자신에게 적합한 표현 수단을 찾았다. 그의 삶이 그의 작품 목록만큼이나 풍성해 보이는 이유는 끊임없이 세상과 교감하며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느끼고 표현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바르다에게 주된 표현 도구는 영화였고, 그는 그 도구를 마음껏 활용했다. 더할 나위 없이.
낙관주의, 유연함, 유머, 삶의 예술화, 창의적 생각, 자신감, 직관을 향한 믿음, 그리고 너그러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얻어갔으면 하는 것들이다.
- 옮긴이 오세은
“한 여성으로서 직관에 따라 작업하고 보다 명민해지려 노력해요. 느낌과 직관의 흐름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 기뻐하고, 의외의 장소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바라보죠.”
“딱히 다큐멘터리는 아니예요. 하지만 픽션 역시 아니죠. 저는 장벽을 부스려 노력해요. 경계를 허물면서 영화에 자유를 주고자 해요. 이러한 형식 속에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죠. 쿠바혁명에 대해 논의할 수도 있고, 연극적 요소를 접목시킬 수도 있고요. 영화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싶어요. 가능성을 한정 짓고 싶지 않아요.”
“다큐멘터리 작업을 결코 멈춘 적이 없어요. 픽션 영화감독이면서 다큐멘터리 역시 손에서 절대 놓지 않는 감독들이 있죠. 저도 그중 한 사람이고요. 저는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번갈아 작업하려 해요. 배움을 멈출 수는 없으니까요. 사실, 저는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워요.”
“제 마음은 계속 활동하고, 제 작업은 마음속으로 흘러들죠. 이게 제가 생각하는 방식이예요. (...) 아주 간단하죠.”
“소통이 되는 커플이라면 사적인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면서 보다 큰 공동체와도 결합할 수 있겠죠.(예를 들어, 사이좋은 커플이면서 조합 회원이기도 한.) 제가 '라 푸앵트'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건 무력함이었어요. 자신들의 지적 감정적 문제들을 떨쳐내지 못하는, 그래서 어떤 그룹에도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커플의 무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관객들이 사회적 쟁점들과 사적인 문제들 사이에 연결 고리가 없다는 걸 이해해주길 바랬어요. 물론 인정 수준의 이해에 이른다면 그 지점에선 이런 대립적인 면들이 사라질 수 있겠죠. 하지만 '라 푸앵트'에서는 위기에 처한 어느 커플을 제시하고 싶었어요. 단지 두 사람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접점을 찾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는 커플을요.”
“영화는 이런 모순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졌어요. 그러고 보면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세상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이 부분이 '오페라 무프 거리'의 다큐멘터리적 측면이라 할 수 있죠. 한 여성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통해 어떤 하나의 이미지를 생성해낸다는 점에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