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함께하는 즐거움
이춘아
2021. 3. 7. 06:56
1969년 여름에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좌파 쪽 여성들이 종속적 관계에서 벗어나려 대항을 하기 시작했고, ‘여성운동’이 태동하고 성장해 나갔어요. 저 역시 제 나름의 방식으로 투쟁했고요.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일 때 저도 시위에 참여했죠. 그들이 목소리를 필요로 했을 땐 보비니에서 목청을 높이기도 했고요. 비록 이런저런 모임들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저는 운동에 전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어요. 일터에서, 가정에서 각각 두 개의 삶을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죠.
[내 몸은 나의 것]이란 책을 쓰기 위해 동료 여성들과 함께 작업하고, 자료조사도 하고, 관련 서적도 많이 읽었어요.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자금을 지원받는 데 실패했죠. 그 외에 어떤 계약도 맺을 수 없었어요. 그게 1972년 무렵이에요. 그럼에도 1969년에 미국에서 장편 ‘라이온의 사랑’과 두 개의 단편 ‘얀코 삼촌’ ‘블랙 팬서’를 만들 수 있었어요. ‘평화와 사랑’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도 한 편 썼고요.
프랑스로 돌아와서는 1970년에 프렌치TV에 방영할 계획으로 ‘나우시카’를 만들었는데, 결국 방송되지 못했어요. 정치적 이유로요. 결과적으로 1966년부터 1975년 사이는 성취한 게 변변치 않죠.
솔직히 말해서 낙담을 좀 했어요. 제 여성적 조건의 모순들도 느낄 수 있었고요. 그리고 제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마티외 드미가 1972년에 태어났어요. 물론 기뻤지만, 일을 하고 일적으로 여행을 하는 데 제동이 걸린 것에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어요. 아이를 가지는 것과는 별개로 영화를 할 수 없다는 게 슬펐죠.
여성 영화감독에게 주어진 여성의 조건은 구체적이고 당면한 문제예요. 그 결과로 나온 게 ‘다게레오타입’이었고요. 탯줄에 연결된 채로 전업주부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러고 나서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작업에 들어갔어요. 결국 자금을 지원받게 된 시나리오였고 1976년 봄 제작에 들어가 촬영을 했어요. 두 15세 소녀의 삶과 생각들을 담은 영화죠. 두 사람은 주요한 문제와 대면해야 해요. 아이를 갖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죠. 그들은 각각 사랑에 빠지고 일, 신념 그리고 사랑과 관련한 여러 모순들과 맞닥뜨려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인물들이죠. 영화의 제목이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이니까. 맞아요. 물론 영화에서 노래를 들을 수 있어요. 페미니스트 뮤지컬이죠.
이야기에 등장하는 세 명의 남자 주인공도 다들 매력적이에요. 그럼에도 한 제작자는 이렇게 남자들을 바보 취급하는 영화에는 자기라면 땡전 한 푼 투자하지 않을 거라고 했죠. 무슨 의미냐고 제가 묻자, 그는 영화 속 남자들 모습은 괜찮았는데 출연 시간이 너무 짧았다는 거예요. 그건 사실이에요. 한 여성의 삶에서 한 명의 남자는 고작 5.1퍼센트 정도를 차지할 뿐이에요. 그가 호감형이어도 그렇고, 아무리 특별한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죠. 여성에겐 직장이 있고, 아이들도 있고, 다른 친구들도 있어요. 사회생활도 해야 하고요. 다른 모든 남성의 영화를 보세요. 역전된 관계를 아무 거리낌 없이 적용시키죠. 서구 영화 중에서 여성이 러닝타임의 5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영화가 몇 편이나 될까요? 범죄영화에서 여성이 등장하는 장면이 얼마나 되나요? 심리 드라마도 마찬가지고요. 남자들은 아직 그럴 준비가 안 된 것처럼 보여요. 네, ‘노래하는 여자’는 여성이 영화의 주요한 테마예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어요. 남성이 아니라 여성들의 아야기죠.
저는 여성들 간의 우정을 재평가하고 싶었어요. 폭력성, 부드러움, 일관성, 연대의 성질을 포함하는 하나의 느낌으로서의 우정을요. 우정은 또한 예기치 못한 변화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후유증도 만만찮죠. 그럼에도 우정은 필수적이고, 살아 움직여요. 함께하는 즐거움이죠. 예를 들어, 보비니 시위 현장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함께 구호를 외치고 군중의 일부가 되잖아요. 단지 이 사람을 만나서 기쁜 걸 넘어, 함께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더욱 기쁘게 느껴져요. 같은 신념을 위해 싸운다는 걸 의미하니까요. 깊이 감동하고, 흥분도 하고요. 함께 말이죠.
영화 말미에서도 같은 상황을 볼 수 있어요. 한 사람은 결혼한 상태이고, 다른 한 사람은 더 이상 아니죠. 하지만 두 사람은 스스로에게 진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같은 감정을 느껴요. 영화를 보면 이런 이미지가 나오죠. 호수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어요. 흐르는 물이 멈추면 그곳엔 일종의 마법 같은 빛이 생겨나 백일몽을 불러일으키죠. 그곳, 그날, 그 순간,두 사람은 일말의 의구심도 없이 완전한 형태의 우정을 느껴요. 왜냐하면 그들은 확장된 개방적 가족 내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죠. 우정도 바로 이곳에 자리 잡고 있고요. 제도적 가족 형태 내에서는 여성들의 우정이 자리할 공간이 없어요. 설령 우정이 존재한다 하더라도요. 여성들은 사회적 친분이라는 게임 속에서 타인을 만나는 경향이 있고, 때로 친구 사이로 발전하죠. 하지만 ‘깊은’ 우정은 주변부적 삶 속에서만 가능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