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백제의 계백
이춘아
2021. 3. 27. 06:34
'階當奮勵’(계당분려: 계백은 마땅히 힘써 용기를 다했다)는 백제의 계백 장군이 5천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나가, 신라의 5만 정예군과 최후 격전을 치른 황산벌 전투에서 병사들에게 남긴 말에서 인용했습니다. [삼국사기] 열전 ‘계백’에 실려 있습니다.
昔句踐 以五千人 破吳七十萬衆 今之日 宜各奮勵決勝 以報國恩
옛날 월나라의 왕 구천은 5천 명의 군사로 오나라의 70만을 깨뜨렸다.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자 힘써 용기를 다해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
- [삼국사기] 열전 ‘계백’
계백(? ~ 660)은 일찍부터 벼슬에 나아가, 그 능력을 인정받아 백제 제16관등 중 1품인 좌평(장관급) 다음가는 2품 달솔(차관급)에 까지 올랐습니다. 서기 660년 나 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자, 계백은 결사대 5천 명을 선발해 출전하게 됩니다. 당시 계백은 백제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던지기로 결심합니다.
以一國之人 當唐羅之大兵 國之存亡 未可知也 恐吾妻孥漫爲奴婢 與其生辱不如死快
한 나라의 백성으로써 나당 연합군의 대군을 맞이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가 없다. 내 처자식이 노비가 되어 적들에게 더렵혀질까 두렵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은 떳떳하게 죽는 것만 못하다
- [삼국사기] 열전, ‘계백’
결국 계백은 자신의 손으로 처자식을 모두 죽이고 전쟁터로 나갑니다. 그런데 처자식을 죽인 계백의 행동은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숱한 찬반 논쟁을 낳았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 초기의 유명한 학자인 권근은, 계백의 행동은 싸움을 하기 이전 이미 적군에게 굴복한 행위로 군사의 사기를 떨어뜨렸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은, 권근의 주장이 병법을 모르는 사람의 터무니없는 비난일 뿐이라고 일축했습니다. 그리고 계백의 행동은 5천 결사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써, 자신의 처자식조차 돌아보지 않고 싸우겠다는 전의를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어쨌든 계백이 이끈 백제의 5천 결사대는 마침내 황산벌(충남 논산시 연산면 일대의 넓은 들판)에서 신라군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백제와 신라의 최고 명장이 맞부딪힌 황산벌 전투의 양상은 초반 기세 싸움과 심리전으로 판가름 났습니다. 처음 전투 상황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라군을 막아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지로 충만한 백제 결사대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라 화랑 관창의 희생 앞에 신라군이 다시 전열을 정비해 거세게 공격하자, 전투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져버렸습니다. 결국 물밀듯이 밀려오는 신라의 대군 앞에 백제의 5천 결사대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그리고 계백은 끝까지 온 힘을 다해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