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백제의 부활을 꿈꾸다
이춘아
2021. 3. 27. 18:54
琛受黑齒
도침(道琛) 지수신(遲受信) 흑치상지(黑齒常之)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끈 5천 결사대를 물리친 신라의 김유신은 곧장 사비성으로 진격합니다. 또한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의 13만 대군 역시 금강 기벌포에 상륙하여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사비성을 향해 쳐들어왔습니다. 서기 660년 7월12일 사비성에 집결한 나당 연합군은 도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합니다. 결국 일주일 만에 사비성은 함락되고, 백제는 678년의 역사를 뒤로한 채 멸망하고 맙니다.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은 백제의 의자왕과 태자 그리고 왕자 3명을 비롯하여 대신과 병사 88명, 1만2천87명의 백성들을 당나라로 끌고 갔습니다. 당나라는 백제를 자신들의 영토로 삼아, 웅진 등 5도독부를 설치해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백제의 역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백제의 부활’을 위해 복신 도침 지수신 흑치상지 등이 이끄는 ‘백제 부흥군’이 당나라에 맞서 전쟁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백제 부흥운동은 무왕의 조카이자 의자왕의 사촌형제인 복신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복신은 승려인 도침과 힘을 합쳐 주류성(충남 한산)을 근거지로 삼아 당나라에 맞서 싸우면서 백제의 부활을 꿈꾸었습니다. 그들은 왜국에서 부여풍을 모셔와 백제의 왕으로 옹립한 후 독립 왕국을 세워, 사비성을 포위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의 장수 유인궤에게 패하자, 포위를 풀고 퇴각해 임존성(충남 예산)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당시 복신과 도침은 스스로 장군이라고 부르면서, 백제부흥군을 불러모아 세력이 더욱 커졌습니다. 이들은 백제의 옛 영토를 다시 찾는 한편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보급로를 끊는 등 나당 연합군에게 큰 타격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백제 부흥운동은 부흥군을 이끈 복신과 도침이 서로 반목하게 되면서, 큰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복신은 도침을 살해하고 그 휘하에 있던 군대를 장악하자,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부여풍과도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결국 복신의 ‘암살계획’을 눈치 챈 부여풍은 미리 손을 써 복신을 죽였습니다. 그 후 부여풍은 고구려와 왜국에 군사 지원을 요청해 당나라와 맞서 싸웠습니다.
부여풍은 서기 663년 백제 부활을 판가름 짓는 일대격전을 준비하고 백강으로 나갑니다. 당시 백제 부흥군은 왜국에서 보낸 지원군과 연합하여, 신라 당나라 연합군과 대전투를 치릅니다. 이 전투가 바로 ‘백강 전투’입니다. 그러나 백강 전투가 신라 당나라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백제 부흥군의 주요 거점인 주류성마저 함락당하자, 백제 부흥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때 부여풍은 고구려로 몸을 피해 달아났고, 왕자 부여충승과 충지가 남은 부흥군을 이끌고 당나라에 항복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장수와 그를 따르는 부흥군만은 임존성에 웅거하면서, 투항을 거부하고 싸움을 계속했는데, 그 장수는 지수신이었습니다.
흑치상지는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백제의 패잔병사 3만여 명을 다시 불러 모아 나당 연합군에 맞서 전투를 계속했습니다. 그는 복신 이외에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백제의 또 다른부흥군의 총지휘관이었습니다. 흑치상지는 복신 부여풍과 협력하여 백제 부흥을 위해 싸우다가, 부여풍이 백강 전투에서 패배하고 주류성마저 함락당하자 당나라에 항복했습니다.
당나라는 투항한 흑치상지에게 지수신이 이끄는 임존성의 마지막 부흥군을 토벌해 ‘당나라에 정성을 보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결국 임존성은 흑치상지의 공격을 받아 함락당하고, 지수신은 고구려로 몸을 피했습니다. 당나라에 투항한 흑치상지는 한때나마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쳤던 ‘백제 부활의 꿈’을 스스로 짓밟은 악역조차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임존성에 남은 마지막 부흥군마저 토벌당한 후, 백제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