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라흐마니노프, 금지된 결혼과 망명
이춘아
2021. 5. 15. 20:43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의 <피아노 협주곡 2번 C 단조 op.18> 만큼 우수와 우울로 가득 찬 선율과 색채를 보여주는 음악도 찾기 어렵다. 이 곡은 우수와 우울로 가득찼던 세기말 전환기에 탄생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세기말 전환기는 새로운 음악 조류가 나타난 음악적 혁명기로 불린다. 특히 라흐마니노프는 후기 낭만주의의 끝을 장식하는 음악가로, 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 C 단조>는 후기 낭만주의의 정점에 있는 곡으로 평가받는다. 음악사에서 낭만주의는 클래식, 즉 고전주의를 헤치고 나온 새로운 음악 조류다.
라흐마니노프에게는 불행했던 가족사로 인해 방황했던 사춘기 시절부터 마음의 안식을 가져다준 고향이 있었다.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곳은 바로 라일락꽃이 만발한 이바노브카 별장이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라흐마니노프가 정신과의사 니콜라이 달의 헌신적인 치료로 그간의 고통스러운 우울증에서 회복되고 난 뒤에 쓴 곡이다. 이 곡이 달 박사에게 헌정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러시아정교회의 독실한 신자였던 할머니의 영향으로 정교회 음악에 익숙해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한다. 하지만 집안 환경을 탓하며 방황하면서 낙제를 거듭한다. 결국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적을 옮긴 그는 그때부터 할머니를 떠나 모스크바의 고모 집에서 기거하게 된다. 나탈리아를 처음 만난 것은 1888년 부활절, 그들의 나이가 각각 열다섯 살과 열한 살일 때였다. 귀족 사틴 가문에 시집간 고모는 모스크바 근교 이바노브카에 여름별장을 갖고 있었다.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피던 이 별장은 훗날 미국으로 망명한 라흐마니노프가 평생 그리워하는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아버지의 가출과 집안의 몰락으로 방황하던 사춘기의 라흐마니노프는 아름다운 여름별장에서 자신의 방황과 예민한 감수성, 예술가적 기질을 깊이 이해해 주는 나탈리아와 사촌 관계를 넘어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4년이 지난 1892년 둘이 결혼을 선언했을 때 사람들은 그야말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당연히 고모부와 고모 즉 나탈리아의 부모가 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고모가 결혼 반대를 위해 내세운 가장 결정적인 명분은 러시아정교회의 금지 조항이었다. 당시에는 교회의 허가를 받지 못하면 관청에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다. 결혼을 선언한 지 9년이 흐른 1901년 9월 간신히 고모 부부의 허락을 받기에 이른다.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 라흐마니노프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라흐마니노프에게 최초로 우울증을 안겨준 사건은 1897년 3월15일과 27일 상트페테스부르크에서 초연된 <교향곡 1번>의 처참한 실퍠였다. 그의 <교향곡 1번>에 호감을 갖고 초연을 지휘했던 알렉산드르 글라즈노프가 술에 취한 채 지휘를 하는 바람에 초연은 엉망으로 망가졌다.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가 1년 동안 매일 일곱 시간씩 작곡에 전념하여 1895년 완성한 작품이었다. 초연의 실패로 인한 좌절감과 실망감은 그를 큰 충격 속에 밀어넣었다.
그러나 오늘날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1번>은 결점을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1번>은 중세풍의 단순 선율의 레퀴엠 ‘디에스 이레 (분노의 날)’를 전 4악장을 관통하는 포괄적 주제로 사용했다. 주제가 포르티시모(매우 세게)로 급류를 이루면서 마치 재앙과 재난을 전도시키는 듯한 예언자적 구성은 고통과 감정의 드라마를 연출하는데, 이런 점에서 이 음악은 19세기 러시아를 너무 앞서간 진보적인 음악이었다. 1892년 결혼 선언 이후 3년이 지나 완성된 이 작품은 어쩌면 금지된 결혼과 사회적 모순에 대해 젊은 라흐마니노프가 품은 분노의 표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생전 기록을 보아도 그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몰두한 곡은 이 작품 말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결혼이 있었던 1902년은 러시아 혁명을 앞둔, 조금은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결혼 후 볼쇼이 극장의 지휘자 자리를 얻은 라흐마니노프는 1907년 혁명의 혼란기 속에서 정치적 이유로 자리를 사임했다. 그리고 3년 동안 독일의 드레스덴에 피신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부인과 딸 둘을 데리고 단돈 5백 루불과 악보 2개만 지닌 채로 스톡홀름행 기차를 탄다. 이렇게 해서 라흐마니노프는 34세의 나이로 러시아와 마지막 이별을 하게 되었다. 이후 계속된 유럽에서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신대륙 미국에 정착한 것은 그의 나이 45세인 1918년의 일이었다. 러시아를 떠난 지 무려 12년이 지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