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함께 쓰는 글은 힘이 세다
이춘아
2021. 6. 27. 00:35
1.
[밥하는 시간]의 저자가 되어 여러 곳에서 다양한 여성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대부분 여성들은 울었다. 글을 읽다가 울고, 자기 이야기를 하다가 울었다. “당신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내 이야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가 울음이었다. 여자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할 자리가 필요하다는 걸 절절하게 느꼈다.
그래서 글을 쓰자고 했다. 자기를 탐구하는 글을 쓰자고 글쓰기의 기술이 아니라 자기를 탐구하는 방법을 읽히자고. 자기와 직면한 각오가 있냐고, 정직하게 자신과 만나고 싶으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내민 여자들의 공통점이 있었다. 마흔 초반에서 이제 막 쉰이 되어 가는 나이, 그들은 중년기라는 삶의 전환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두 주에 한 번씩 다섯 달 동안 글쓰기를 했다. 그건 하나의 글감이나 주제를 가지고 보름 동안 시간과 마음을 글쓰기에 온전하게 모으는 일이다. 매일의 일상 속에 배경처럼 글쓰기의 주제를 깔고 살아야 하고, 글에 몰두해야 한다.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숱하게 쓰고 다시 써, 겨우 마감한 글을 구성원 모두가 보는 공개된 밴드에 올려야 한다. 그것이 글쓰기를 한 사람들의 일이었다.
글쓰기를 안내하는 사람인 나는 자기 탐구의 목적을 명확하게 해야 했다. 자기를 탐구해서 어디에 이를 것인가? 중년기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는 다른 삶의 문법을 개척해야 하는시기다. 삶의 정오가 지난 것이다. 삶에서 떠나 보내거나 통합해야 하는 것, 새롭게 발견해야 하는 것들을 바라봐야 하는 나이다. 해결하지 못한 과거의 정서적 과제를 다루고, 젊은 시절의 욕망이나 환상의 횡포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를 인식하는 고통스런 과정이기도 하다. 내가 창조와 파괴성을 동시에 지닌 존재임을 아는 일은 삶의 비극적 감각을 익히는 일이다. 이 감각은 불행이나 실패가 단순히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의 비극적 결함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점을 깨달음으로써 온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만든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런 고통스런 깨달음을 통해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성숙해야 하는 것이 중년의 과제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날, 청계 마을의 이른 아침을 잊을 수 없다. 오월의 푸른 날, 간밤의 비로 촉촉해진 풀과 나무들, 산속 공기는 태초의 것인 양 신성했다. 세상에서 조금 떨어져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공간에서 산책하고, 새로운 이름을 정하고, 왜 글을 쓰고 싶은지 쓰고 말했다. 말이 흔들리고 눈물이 떨어졌다. 글쓰기의 이유는 제각기 달랐다. 기대와 설렘부터 고통과 혼란의 외침까지 담겨 있었다.
두 주 동안 각자 글을 쓰고 토요일 아침 일찍 만났다. 명상으로 시작해 글쓰기의 고전 같은 책의 구절을 돌아가며 읽고 자신의 글을 나누었다. 제각기 살아온 삶도 다르고 현재 처한 상황도 다른 다섯 사람이 과연 어디까지 자신을 직면하고 드러낼 수 있을까? 상처와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현장에 자신을 세우는 일은 위태로운 일이기도 했다. 비로소 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을 시작했는지 깨달았다. 이 글쓰기가 성공할 수 있을까? 정직하게 자신과 만날 수 있을까? 고통을 헤집다가 오히려 어둠 속에 갇히거나, 더욱 혼란스러워지거나, 여전히 막막하거나… 그러면 어쩌지? 더럭 겁이 나기도 했다. 더구나 나는 스스로를 어떤 자리에 세운 건가? ‘너 자신을 더 깊이 봐.’, ‘너의 단단한 벽을 봐.’, ‘너의 환상을 보고, 너의 어리석음을 보라고!’, ‘언어 뒤로 적당히 숨지 말라고!’, 냉정하게 밀어붙이는 자리에 나를 세웠으니 말이다.
글쓰기를 진행하면서 알게 된 게 있다. 같이 쓰는 글은 힘이 세다! 모두 서로의 글에서 자기를 본다. 타인의 아픔에서 자신의 아픔을 읽고, 타인의 나약함과 모자람이 자신의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누군가의 평안과 성숙을 배우고, 누군가의 정직한 고백에 함께 웃고 운다. 수치심으로 쪼그라들어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여성인 우리 모두가 겪은 일임을 깨닫게 되고, 자신을 믿을 수 없어 혼란스러워 하는 누군가를 보며 그게 모두의 혼란임을 이해하게 된다. 타인의 고백을 들으며 나의 글이 깊어지고, 타인의 상처로 나의 상처를 되비치며 더 깊이 자신 속으로 들어 간다.
다들 참 많이 울었다. 글을 읽으며 울고, 들으며 울고, 말하다 울고, 바라보다 울고, 울다가 웃고…. 눈물의 절정은 죽음을 다룰 때였다. 자신의 유서를 읽으며 울고, 다른 이의 유서를 들으며 울었다. 그래서일까, 죽음 뒤의 ‘미래 자서전’이 그토록 생생하고 아름다웠던 것은.
신기하게, 아니 당연하게도 글쓰기의 후반으로 갈수록 각자의 색깔은 선명해졌고, 자신을 찾아가는 힘 또한 커졌다. 나의 불안은 기우였다. 글쓰기 장의 힘, 함께하는 사람의 힘, 공간의 힘, 모든 역동들이 함께했다.
2.
다섯 번의 낭독 공연이 있었다. 카페와 찻집, 요가원과 소극장에서. 글쓰기를 하는 일과 공연으로 올리는 일은 또 다른 일이었다. 낭독한 사람들은 또 다른 용기가 필요했다. 글쓰기를 할 때는 자신과 직면하는 용기가 필요했다면, 이제는 타인 앞에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용기가, 그건 오해받고, 상처 받을 용기이기도 했다.
들은 여자들은 말했다. “참 용기 있어요”, “멋져요!”, 정말 사랑이 많은 분들이예요”, “무한 감동이어요”, “뭉클했어요!”, “부러워요, 나도 이런 연대가 필요해요”…… 많은 이들이 울었다. 낭독을 들으며 울고, 낭독자를 안고 울었다. 그래, 많이들 안았다. 눈물 그렁한 눈으로 서로를 안고 보듬었다.
만남이라는 게 몸 없는 이모티콘처럼 허전해져 가는 세상에서 아픔과 실패, 좌절을 이야기하는 이 만남은 특별하다. 먼저 자기 상처를 드러내면 서로가 그 상처를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경험의 보편성이 있는 거다. 내 상처는 나의 것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지나는 우리 것이기도 하다. 상처와 아픔에게 정확한 이름을 주고 햇빛에 드러내면 그건 더 이상 상처도 아픔도 아니다. 나를 키운 소중한 경험이고 빛나는 자원이다.
나는 기대한다. 평범한 여자들이 자기 이야기를 진솔하게 할 수 있는 자리들이 마련되기를. 글을 쓰고 나누며 자신의 삶을 든든하게 만들어 가는 작은 마을들이 여기저기 생기기를, 남의 삶을 우러러보고, 타인의 욕망을 뒤따르며 초라해지고 공허해지는 대신 내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사람들, 나의 삶을 한 땀 한 땀 고귀하게 만들어 가는 정직하고 용기 있는 여자들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되고, 생겨나기를.
내년엔 또 어떤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벌써 기대로 가슴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