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냉면을 먹으며
이춘아
2021. 7. 31. 22:08
북쪽의 산골마을 사람들은 자정이 넘은 심야에도 모여서 면을 뽑고 육수를 끓여서 냉면을 만들어 먹는다(백석, [산중음 야반]). 눈 덮인 산촌의 어둠과 추위 속에서도 그들의 생활은 활기에 넘쳐 있다. 추위 속에서 찬 냉면을 먹고, 차가운 산야로 그들은 나아간다. 백석은 이 냉면의 맛을 “수수하고 슴슴한 것” “고담하고 소박한 것”이라고 말했다.
백석이 먹은 냉면의 맛은 내가 일산 신도시의 식당에서 사먹는 냉면의 맛과 그 기본과 지향성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기본은 인공이 자연을 자향하는 극한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육수의 순수함과 가벼움, 그리고 북방의 눈보라와 폭양을 낱알 속에 간직하는 메밀의 서늘함이고, 그 지향성은 개인에서 마을로 퍼져나가는 맛의 공적 개방성이다. 판문점에서 두 정상이 드신 냉면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영변 북쪽으로는 묘향산맥의 산세가 묘향산 향로봉, 칠성봉, 강선봉, 가마봉으로 이어져 남쪽으로 출렁거리면서 첩첩연봉을 이룬다. 이 깊은 산속에 진달래꽃이 지천으로 피는데, 진달래꽃은 메마른 돌밭, 허름하고 물기 없는 비탈에서 더욱 고운 색깔로 피어난다. 여성의 몸으로 이 깊은 산속의 꽃을 따와서 이별의 길 위에 뿌리겠다고 하니 그 사무친 슬픔과 한을 알 만하다.
영변군 북신현면은 묘향산 동남쪽 기슭의 산골마을이다. 백석의 재세 시에 이 마을에 국숫집(즉 냉면 식당)이 있었는데, 이 식당에서는 ‘농짝같은’ 도야지고기를 걸어놓았고, 손님들이 시커먼 털이 박힌 돼지수육을 맨모밀국수에 싸서 ‘한입에 꿀꺽’ 삼켰다고 한다([북신]).
백석은 이 먹성 좋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난데없이 소수림왕과 광개토대왕을 생각한다.
나는 몇 년 전에 압록강 두만강의 중국 쪽 물가를 따라서 며칠 여행한 적이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를 처음 보았고, 집안, 통구, 용정처럼 이름만 듣던 대처들과 물가를 따라 들어선 작은 마을들도 수박 겉핥기로 돌아보았다. 큰 거리와 골목에서 냉면을 파는 식당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 식당들은 출입문과 유리창에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세 발 달린 까마귀(삼족오)의 문양을 그려놓고 있었다. 까마귀뿐 아니라, 주작, 청룡 같은 고구려 무덤 속의 문양도 있었고 여름볕에 그을린 사람들이 그 식당 안에서 냉면을 먹고 있었다. 식당뿐 아니라, 여염집 대문이나 담장 골목 어귀에도 고구려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 문양들은 무덤 속의 생동감과 표현력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이 집 저 집에서 제멋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디자인되고 승인된 마을의 아이콘임을 알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비석과 장수왕의 체취가 남아 있는 고구려의 옛 마을에서 고구려의 후손들이 고구려의 문양이 그려진 마을과 식당에서 냉면을 먹고 있었다.
그 고구려의 거리에서 나는 백석을 따라서 광개토대왕과 소수림왕을 생각했다. 나는 그 고구려의 임금님들이 반드시 냉면을 많이 드셨으리라는, 합리적 확신에 도달했다. 두 임금님뿐 아니라, 안시성에서 싸운 양만춘 장군과 청천강에서 싸운 을지문덕 장군, 그리고 그 휘하의 수많은 장수와 군병들도 냉면을 군대 급식으로 먹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메밀은 고구려의 산야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으니 싸움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군량이었고, 그 육수와 국수의 맛은 시원하고 또 열려 있어서 대륙을 달리고 지키는 사람들의 정서에 맞는다.
백석의 [북신]에 따르면, 영변의 국숫집에서는
농짝 같은 도야지고기’를 걸어놓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그림은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나온다(고구려 안악 3호분 벽화). 이 생활의 풍경은 그야말로 고구려적이다. 큰 짐승을 잡아서 통째로 갈고리에 걸어서 매달아놓고 아궁이에 불을 때는 그림이다. 나는 이 고구려의 일상을 보면서 소수림왕 때나 광개토대왕 시절의 냉면을 떠올린다.
거칠게 말하자면, 고구려 고분벽화는 연대가 내려옴에 따라서 생활에서 초월, 구상에서 추상으로 전개된다. 초기의 그림은 주로 삶의 일상적 구체성이 묘사되어 있고 후대로 갈수록 도교적 유토피아의 세계가 넓어진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은 생활의 모습이 그려진 초기의 것들인데,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고구려의 냉면은 이 초기의 화폭 어디엔가 숨어 있을 터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대장술과 연금술, 물질과 정신, 현실과 초월, 구상과 추상, 찰나와 영원, 시간과 초시간, 무기와 악기, 전쟁과 노래에 걸쳐서 문명 전체를 사유하고 표현할 수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그들의 사유와 몽상과 생활이 어우러진 교향악이 울린다. 그들은 대지에 살았고, 천공에 살았고,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또다른 시간 속에서 살았다. 그들은 현세의 땅 위에서 작동하는 물리적 힘의 실체를 알았고, 천상을 흘러가는 리듬의 떨림을 알았다. 나는 이 리듬 속에서 메밀국수를 삶고 육수를 끓이는 고구려의 냄새를 맡는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부엌에서는 늘 아궁이에 불이 지펴져 있고 가마솥에서 김이 오른다. 이것은 필시 고기를 고아서 냉면 육수를 끓이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