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총 들고 일본군과 싸운 ‘부산의 딸’
이춘아
2021. 8. 7. 23:41
정운현, [조선의 딸, 총을 들다], 인문서원, 2016
박차정(1910~1944)은 1910년 부산 동래에서 박용한과 김맹련의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일찍부터 신문물에 눈을 뜬 선각자였다. 구한말 동래 지방의 신식학교인 개양학교와 보성전문학교 졸업 후 탁지부 주사를 지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무단정치에 비분강개하여 1918년 1월 유서 한 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모친은 약산 김원봉과 의형제를 맺었던 김두전과는 육촌,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김두봉과는 사촌 간이었다. 박차정이 일찍부터 민족의식이 강했던 것은 집안 가계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차정이 항일의식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1924년 5월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부터였다. 이듬해 일신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했는데 이 학교는 선교 계열이면서 조선어, 역사, 지리 등의 교과에 중점을 둔 민족의식이 강한 학교였다. 이 학교는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으며, 1919년 3.1혁명 때는 부산 지역 만세항쟁 전개에 크게 기여했다. 재학 시절부터 박차정은 학생들에게 독립운동에 동참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다녔다. 그는 일신여학교의 동맹휴학을 주도하곤 했다.
박차정이 전국 규모의 여성운동 민족운동에 나서게 된 것은 1927년에 결성된 근우회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근우회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여성단체들이 통합하여 단체로, 신간회처럼 반제 반봉건운동을 기치로 내걸었다.
박차정은 1929년 7월부터 경남 전형위원, 33인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원, 그리고 33인 중 14인으로 구성된 상무집행위원 등 핵심으로 활동하였다. 박차정이 맡은 일은 출판과 선전 업무. 그는 일신여학교 시절부터 글 솜씨가 뛰어나 학교 교지에 시, 수필 등을 여럿 발표했다.
근우회 활동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1930년 1월에 발생한 이른바 ‘근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근우회 사건은 1929년에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에 이어 서울의 이화 숙명 배화 동덕여고와 경성여자상업 경성보육학교 등 11개 여학교에서 1월 15일 일제히 동조 시위를 벌인 일을 말한다.
허정숙과 함께 시위 배우인물로 지목돼 체포된 박차정은 서대문경찰성에서 취조를 받았는데 세 차례의 심문 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당해 꼬박 한 달이나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어 1930년 1월에는 부산방직 파업을 주도하다가 동래에서 체포되어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이 일로 일경의 감시가 계속되면서 국내에서 활동하는 데 한계를 느끼게 됐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때마침 김원봉의 의열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작은 오빠 박문호로부터 중국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1930년 2월 중국으로 방명했다(박차정의 두 오빠는 모두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박문호는 고문 후유증 끝에 28살에 순국했다).
의열단에서 박차정은 평생의 배필을 만났다. 상대는 의열단장인 약산 김원봉. 1931년 3월 북경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이듬해에 남경으로 거처를 옮긴 박차정은 남편과 함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개설에 앞장섰으며, 개교 후에는 여자부 교관으로 교양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이때부터 임철애라는 가명을 썼다.
1935년 6월 남경에서 김원봉 주도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그는 핵심멤버로 활동했다. 지청천 장군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민족혁명당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조선 여성들의 각성과 단결을 호소하기도 했다. 남경조선부녀회의 선언문 한 대목을 보자
“우리 조선 부녀를 현재 봉건적 노예제도 하에 속박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제국주의이고, 또 우리를 민족적으로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제국주의이다. 우리들이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부녀는 봉건제도의 속박 식민지적 박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또 일본 제국주의가 타도된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혁명이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방면에서 진정한 자유 평등의 혁명이 아니라면 우리 부녀는 철저한 해방을 얻지 못한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민족혁명당은 그해 11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창립했다. 국내외 혁명가를 총망라하여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중국이 항일전선에 참가하기 위해 만든 단체였다. 박차정은 당시 장사에 머물고 있던 임시정부에 특사로 파견돼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라디오 방송을 하기도 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민족전선연맹은 1938년 10월 한중연합작전을 펼 무장 세력으로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였다. 대장은 김원봉이 맡았는데, 주요 책략으로 전선 및 적후 공작, 동북진출 세 가지를 설정하였다. 이때 박차정은 22명으로 구성된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의 단장을 맡았다.
1939년 2월, 조선의용대는 강소성 곤륜산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 참가했던 박차정은 일본군이 쏜 총탄에 맞아 늑골 부위에 부상을 당했다. 게다가 지병인 관절염까지 겹쳐 결국 해방을 1년 남짓 앞둔 1944년 5월27일 중경에서 순국했다. 불과 서른 넷이었다.
해방 후 1945년 12월 귀국한 남편 김원봉은 아내의 유골을 자신의 고향인 경남 밀양 감전동 뒷산에 안장하였다. 국립묘지 안장은 차치하고라도 박차정의 묘에는 장삼이사의 묘에도 흔히 있는 상석 하나 없다. ‘약산 김원봉 장군의 처, 박차정 여사의 묘’라고 쓴 작은 비석 하나가 달랑 세워져 있을 뿐이다.
박차정의 독립유공 공적은 한동안 남한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의 사회주의 사상과 노선 때문이었다. 남편 김원봉의 월북도 하나의 요인이 됐다. 사후 반세기 만인 지난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그러나 의열단장 출신으로 임시정부 군무부장(오늘날 국방부 장관)을 지낸 남편 김원봉은 아직도 서훈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건국훈장은 해방 전, 즉 일제하의 항일투쟁 공로에 대한 국가 차원의 예우이자 보상이건만 아직도 이념의 잣대가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