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소소한 일상의 역사성
이춘아
2021. 8. 21. 08:24
어느 날 나는, 내가 ‘가족이란 이름으로’ 만난 나의 직계 여성들과의 수많은 기억들을, 나의 삶 위에 차례로 세워보고 싶었다. 그 세워둔 조각들을 생각하다, 그걸 ‘추억’이란 이름으로 묶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2011년부터 차근차근 생각나는 대로 기록해두었다. 중간중간 다른 바쁜 일들이 생기면 6개월도 쳐다보지 않다가 방학이 되면 다시 들여다보고는 혼자서 옛 생각에 잡히곤 했다. 조금씩, 주섬주섬, 조용한 동네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다, 춤을 추다 하면서 거의 4년 동안 이 추억들을 안고 있었다.
외할머니부터 손녀에 이르기까지, 근 100년에 걸친 여자들의 삶과 나의 60여 년간의 일상과 잔잔한 추억들! 외할머니의 출생과 손녀 채림의 출생 간격을 보니 그 사이엔 100여 년의 세월이 들어 있다. 모녀 5세대! 아! 많은 이야기들이 펼쳐질 듯 하다. 나는 외할머니와의 추억부터 하나하나 생각해보았다. 그리곤 어머니와 나의 삶, 그 다음 딸과 손녀 이야기를 그림 그리듯, 실타래 풀듯 하나하나 펼쳐나가 보고 싶었다. 그 모녀 5세대의 삶을 관통할 키워드는 무얼까?
누구나 자신의 삶의 궤적을 세세히 훑어보면, 이런 자그마한 추억들과 그로 인한 행복들이 석류알처럼 새겨져 있을 것이다. 시간이란 미끄럼틀을 타고 움직이다 보면, 다양한 공간이 보이고, 그곳에는 늘 마주치는 사람이 있다. 좋은 추억이든 나쁜 추억이든, 새삼 가릴 것 없이 나의 지난 모든 것은 바로 나였고, 아마 앞으로도 별반 다름없이 나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나의 집필 소식을 들은 제자들이, 함께하는 마음으로 1900년부터 2000년까지 그 100년의 여성의 일상을 훑어내는 글을 적는 일에 동참해주었다. 내 가족사를 덮고 있는 한국여성사를 시대별로 간략히 정리해보는 정도이지만 미시적 삶들도 거시적 맥락과 통하기 때문에 소소한 일상의 역사성이 이해되리라 본다.
내 인생의 처음 시간대에 놓여 계시는 가장 윗세대 여성은 나의 ‘외할머니의 시어머님’, 그러니 나의 ‘어머니의 조모’, 즉 나에게는 증조모이신 ‘하야 할머니’이시다. 그러나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어딘가에 그분은 ‘건넛방에 늘 앉거나 누워 계셨던 분’이란 아련한 이미지만 남아 있다. 그분과 나눈 대화나 어떤 상호작용도 기억나지 않으므로 아쉽게도 나의 인생에서 그분과의 추억은 없다.
그 다음 나의 삶에서 가장 어른이신 분은 그래도 40여 년간 만나면서 이런저런 추억을 간직하게 해주신, 가장 어른은 외할머니 신돌이(1909년생) 여사이다. 한때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이 전개될 때, 나는 나의 부계 성 옆에 붙을 나의 모계 성에 할머니의 성을 넣어보았다. 이신기숙! 좋아! 그래서 가끔 방명록을 쓸 때, 나는 자랑스럽게 그 넉 자를 적어보았다. 성장하면서 많은 어르신들을 만났지만, 내가 생각하건대 외할머니는 참 훌륭한 분이셨다. 할머니가 ‘좋았다’라는 느낌보다는 ‘훌륭해’ 보였다라는 것은 순전히 나의 개인적 판단이겠지만, 나에게 이런저런 인간사를 들려주실 때마다 든 생각이 흠모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대는 엄마 박쾌활(1928년생) 여사, 그리고 나, 이기숙(1950년생), 그 다음 나의 딸 임지현(1977년생), 그리고 또 그녀의 딸 김채림(2005년생)은 가족 속에서 나와 많은 추억을 공유하는 직계 여성들이다. 우린 다 다른 성을 가진, 직계 혈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