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길 위에는 희망이 있다
이춘아
2021. 9. 4. 00:15
(저자 서문)
떠돌이, 뜨내기, 부랑자, 정착하지 못하는 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 밀레니엄에 들어선 지금, 새로운 종류의 유랑 부족이 떠오르고 있다. 결코 노마드가 되리라고 상상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여행길에 나서고 있다. 그들은 전통적인 형태의 주택과 아파트를 포기하고 누군가는 ‘바퀴 달린 부동산’이라고도 일컫는, 벤과 RV(Recreational Vehicle), 스쿨버스, 캠핑용 픽업트럭, 여행용 트레일러, 그리고 평범한 낡은 세단에 들어가 산다. 그들은 중산층으로서 직면하던 선택들, 선택 불가능한 그 선택들로부터 차를 타고 달아나는 중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은 ‘홈리스’라 부른다. 새로운 노마드들은 그 꼬리표를 거부한다. 주거 시설과 교통수단을 둘 다 갖춘 그들은 다른 단어를 쓴다. 그들은 자신들을 아주 간단하게 ‘하우스리스’라고 칭한다.
멀리서 보면,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무 걱정 없는 은퇴한 RV족으로 오인될 수 있다. 큰맘 먹고 영화를 보러 가거나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할 때면 그들은 군중 속에 자연스레 섞여 든다. 사고방식과 외양으로 보면 그들은 대체로 중산층이다. 그들은 빨래방에서 옷을 세탁하고, 샤워를 하기 위해 피트니스 클럽에 등록한다. 많은 이들이 대침체(2007년 미국에서 촉발되어 2009년 무렵까지 이어진 전 세계적 경제침체 상황)로 인해 저금이 사라져버린 이후 유랑 생활에 나섰다. 위장과 휘발유 탱크를 채우기 위해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힘든 육체노동을 한다. 임금은 낮고 주거비용은 치솟는 시대에, 그들은 그럭저럭 살아 나가기 위한 한 방편으로 집세와 주택 융자금의 속박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켰다. 그들은 미국을 살아내고 있다.
하지만 다른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들에게도 생존이 전부는 아니다. 그래서 필사적인 노력으로 시작된 것은 좀 더 위대한 무언가를 외치는 함성이 되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최소한의 생활 이상의 무언가를 열망하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음식이나 거주지만큼이나, 희망이 필요하다.
그리고 길 위에는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은 앞으로 나아가는 힘에서 생겨나는 부산물이다. 이 나라 전체만큼이나 넓은, 기회의 감각, 뼛속 깊이 새겨진, 더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신념. 그것은 바로 앞에, 다음 도시에, 다음번 일자리에, 다음번 낯선 사람과의 우연한 마주침 속에 있다.
공교롭게도, 그 낯선 사람 중 일부 역시 노마드다. 온라인으로, 일터에서, 전기나 수도 따위의 공공설비 없이 자급자족 캠핑을 하는 동안에, 그들이 만나면 부족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동류의식이 있다. 누군가의 밴이 고장 나면 그들은 십시 일반 돈을 걷는다. 그들 사이에 번져가는 느낌도 있다. 무언가 큰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 나라 전체가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고, 낡은 구조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으며, 자신들이 새로운 무언가의 진원지에 있다는 느낌이다. 한밤중에 캠프파이어를 함께 둘러싸고 있노라면 마치 유토피아를 살짝 맛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내가 글을 쓰는 지금은 가을이다. 곧 겨울이 올 것이다. 계절성 일자리들에서 늘 있는 일시 해고가 시작될 것이다. 노마드들은 캠프장의 짐을 싸서 그들의 진짜 집, 길 위로 돌아가 미국의 혈관을 따라 혈구들처럼 움직일 것이다. 친구들과 가족을, 혹은 그저 따뜻한 장소를 찾기 시작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륙을 시원하게 가로지르며 여행을 할 것이다. 모두가 거리를 계산할 것이고, 그 여정은 미국이라는 슬라이드 필름을 상영하듯 펼쳐질 것이다. 패스트푸드 식당들과 쇼핑몰들, 서리에 덮여 잠든 들판들, 자동차 판매점들, 초대형 교회들, 밤새 영업하는 식당들. 단조롭게 펼쳐진 평야들. 가축을 살찌게 하는 사육장들, 가동이 중단된 공장들, 구획된 땅들, 대형 할인점들. 눈이 쌓인 산봉우리들. 길가의 풍경은 낮을 지나 어둠 속으로, 피로가 밀려올 때까지 필름이 감기며 뒤로 멀어진다. 침침해진 눈으로, 그들은 도로에서 벗어나 쉴 곳을 찾는다. 월마트 주차장에서, 조용한 교외의 거리에서, 트럭 휴게소에서, 공회전하는 엔진의 자장가에 둘러싸여서, 그리고 이른 아침이 되면, 누군가 알아차리기 전에 그들은 고속도로로 돌아와 있다. 다시 차를 몰며, 그들은 그 사실에 마음을 놓는다.
미국의 마지막 자유 공간으로 주차 구역이 있다는 사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