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조선의 여성들에게 성리학이란

이춘아 2021. 9. 17. 22:46

실학박물관, [여성, 실학과 통하다], 2017.

이순구, ‘조선 여성들은 성리학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조선의 여성들에게 성리학이란 무엇이었을까? 처음 여성들에게 성리학은 매우 낯선 ‘무엇’이었다. 물론 초기에 남성들에게도 성리학이 그렇게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남성들은 스스로 성리학을 수입했고, 또 그것을 조선의 중심 이념으로 위치 지은 만큼 성리학에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낯설고 익숙하지 않더라도 빠르게 받아들이면서 배워나갔다. 

그에 비하여 여성들은 남성들을 거쳐서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에 속도도 더디고 배울 기회도 많지 않았다. 여성들은 여전히 불교에익숙했다. 조상제사나 각종 재를 절에서 행하고 또 부처를 통해 복을 빌기도 하면서 이른바 종교적 위안을 얻는데에 불교는 문제가 없었다. 남성들이 고려 말 불교의 권력화, 혹은 부패성에 민감했던 것과는 달랐다. 

조선에서 여성들이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자신들에 대한 도덕적 요구가 강력해지면서라고 할 수 있다. 남녀의 역할을 확연히 구분하고, ‘재가’를 부도덕하게 보며, 절에 가는 것이나 음사를 금지하고, 거리 행사 관람을 금지하는 등 고려와 달리 강력한 규범들이 만들어지고 시행되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달라졌음을 느꼈을 것이다. 

성리학이 조선의 중심 이념으로 자리 잡고 그에 의해 사회가 재편되어 가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됐기 때문이다. 조선 여성들은 성리학에 의한 사회 변화의 한가운데에 자신이 있게 되었음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조선이 성리학 세상이 됐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본격적으로 여성들의 삶과 연관지어 생각한 사람은 인수대비(1437~1504)이다. 인수대비는 [내훈]이라는 교훈서를 썼다. 이 교훈서는 규범화를 목표로 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왜 이 시기에 규범서를 내놓았느냐 하는 점이다. 인수대비는 당대 최고의 여성 지식인이었다. 유교도 알고 불교도 잘 알았다. 시아버지 세조와 함께 불경 번역에 참여한 적도 있다. 그런 인수대비가 어떤 생각에서 여자들에게 다분히 성리학적인 교범서를 만들어주고자 한 것일까? 

“그러나 여자는 그렇지 않아서 한갓 길쌈의 굵고 가는 것만을 달갑게 여기고 덕행의 높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이 내가 날로 한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성인의 학문을 보지 못하고 하루 아침에 갑자기 귀하게 되면 이는 원숭이에게 의관을 갖추어준 것과 같다.”
“한 몸에 대한 가르침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한번 그 도리를 잃으면 아무리 후회해도 어찌 좇을 수가 있으라? 너희들은 이를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서 날마다 성인이 되기를 기약하라.”

인수대비가 [내훈]의 서문에서 한 말들이다. ‘덕행’과 ‘성인의 학문’을 강조하고 ‘성인되기’를 삶의 목표로 삼으라고 하고 있다. 모두 성리학적 도덕성과 관련된 말들이다. 

‘성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리학이 말하는 도덕적 완결성을 갖춘 인간이다. 성리학은 중국 송대에 발원하여 이 시기에 이르기까지 지식인 사회에 널리 보급된 유학전통의 한 단계이다. 성리학은 유학전통의 다른 단계, 이를테면 선진유학이나 당 왕조 시대의 유학과 비교해볼 때, 인간이 도덕수양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보편적 가능성을 강하게 긍정했다. 성리학의 많은 이론적 탐구는 ‘성인됙’라는 목표로 귀결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수대비는 조선에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성인’이라는 개념에 주목한 것이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이때 조선 여성들은 아직 불교적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었다. 특히 왕실 여성의 불교 의존도는 상당히 높았다. 인수대비 자신도 불교를 좋아했다. 

흔히 인수대비가 여성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내훈]을 썼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인수대비의 의도가 통제에만 있었다면 굳이 ‘성인’이라는 주제를 논의할 필요가 없다. ‘성인되기’는 통제가 아니라 내면화와 자발성에 의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인되기’를 요구했다는 것은 여성들에게 성리학의 본질에 접근하는 길을 열어놓고 스스로 주체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조선후기 여성들은 일단 글을 많이 썼다. 조선전기에도 여성들이 글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간 대비 그 양이 엄청나게 늘었다. 거듭 말하지만, 성리학이 지적 능력을 향상시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은 궁금증을 가지고 성리학 혹은 그와 관련한 글을 썼다. 

이사주당(139~1821)과 이빙허각(1759~1824)은 지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책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태교신기]와 [규합총서]가 그것이다. [태교신기]는 임신 출산서이고, [규합총서]는 가정생활을 잘 영위하기 위한 가정관리배고가서이다. 그리고 임윤지당(1721~1793)과 강정일당(1772~1832)은 대표적인 성리학자라고 할 수 있다. 각기 [윤지당유고]와 [정일당유고]라는 문집이 있다. [윤지당유고]가 보다 더 성리학 이론서에 가깝고, [정일당유고]는 실천서적 성격이 좀 더 강하다. 

성리학은 일차적으로 여성들도 인륜 도덕을 실천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도덕적 주체성을 갖게 했다. 그런데 여성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도덕성을 있게 하는 성리학의 원리를 좀 더 탐구하고자 하였다. 자연히 여성들의 지적 능력이 향상되었다. 이는 조선 여성사에서 큰 변화였다. 조선 여성들의 사고 영역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인수대비와장씨부인을 거쳐 임윤지당과 강정일당에 이르는 동안, 조선 여성들은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성리학의 주체가 되어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