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신화의 의미
이춘아
2021. 10. 10. 07:58
추모왕이 엄리대수에 이르러 외치는 당당한 모습을 보라! 그는 모세처럼 하나님 야훼의 영험한 건능을 빌릴 필요가 없다. 그에겐 야훼의 지팡이가 필요없다. 그 본인이 하백의 딸의 아들이다. 따라서 그는 물(땅)의 신에게 곧바로 명령할 권능을 지니고 있다: “내가 곧 하늘신과 땅신의 아들 추모왕이다.” 그는 이미 “건도(개국)”하기 이전에 이미 추모왕으로서의 권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산천이 모두 자신이 추모왕임을 인가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내가 곧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엮고 거북이를 띄워라!”
우리는 이 메시지를 신화적 사건으로 해석해서는 아니된다. 신화속의 몇 사람이 영험스러운 산천의 도움을 입어 외나무다리 같은 것을 간신히 건넌 가냘픈 사건으로 읽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나는 “환인”에 와서 비로소 내 생애 처음으로 “신화”의 의미를 실감나게 느껴보는 듯 했다. 신화의 배경에는 엄청난 역사적 사건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신화는 그 엄청난 사건의 기술을 단순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추모왕은 북부여의 막강한 세력이었을 것이다. 비문은 그의 남하를 “순행”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소수의 도망침이 아니라, 대규모의 민족이동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활 잘쏘고 말 잘타며, 도강의 기술이 탁월한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고려 고종시의 대문호인 백운거사 이규보(1168~1241)가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자료로 삼었던 원사료 중의 하나인 [구삼국사] 중의 [동명왕본기]를 읽고 김부식이 그 진실한 사태를 너무 소략하게 처리한 것을 통탄하면서 외치는 한마디는 참으로 오늘 우리가 되씹어 볼만하다.
“내가 동명왕기사를 세 번 반복해 읽으면서 그 문장의 맛을 음미하고 점점 그 본원으로 섭렵해 들어가니 이는 환이 아닌 성이요 귀가 아닌 신의 일이로다!”
나는 이날 아침밥도 먹지 않고 새벽기운을 놓칠세라 옥수수 들판과 황금빛으로 물든 벼이삭 논두렁을 마구 달렸다. 어제 흠뻑 내린 비로 티끌먼지 하나 없이 씻겨내린 청명한 가을하늘, 그 아래 굽이치는 황금들판은 단풍 물들은 산하의 청아한 기운과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형성하면서, 나에게 싱그러운 파노라마를 선사하고 있었다. 카메라에 포착된 영상의 질점들은 외설악 연못을 튀어오르는 잉어비늘에 반사되는 햇빛보다 더 강렬하게 나의 시선을 자극했다. 10월 3일과 4일 양이틀간 나의 카메라에 담긴 영상들은 나의 생애에서 가장 고귀한 신의 선물이었다.
나는 드디어 비류수 혼강 가에 섰다. 나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검은 구름 흘령을 휘덮으니
산들은 보이지 않네
그러나 그 가운데
수천의 사람들이 나무를 자르며
집을 짓는 소리가 서려있다
왕이 외치시는 듯 하다
하늘이 나에게 여기 이 땅에 성을 쌓으라고
독려하시는구나!
홀연히 운무가 흩어지니
드높은 궁궐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었다.
이러한 시구절의 바로 그 현장에 내가 서있는 것이다. 어제까지 비구름에 덮혀있던 “흘승골성”이 갑자기 나에게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비류수 너머로! 아침햇살에 비류수에 비치는 흘승골성의 모습은 팔레스타인의 유대광야에 우뚝 서있는 마사다요새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정교하고 더 웅장한 난공불락의 거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