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장수왕릉

이춘아 2021. 10. 16. 19:07



류연산, [고구려가는 길], 아이필드, 2004.

장수왕릉

태왕릉에서 동북쪽으로 천 미터, 호태왕비에서는 1,650미터 되는 곳에 고구려의 계단 돌칸 무덤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장군총이 있다.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이 무덤은 고구려 20대 왕인 장수왕의 무덤이다. 장수왕이 생전에 건립한 자기의 영원한 안식처인 셈이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장례를 특별히 후하게 치렀다. 사람이 사는 시간은 짧고 죽어서 묘지에 누워 있는 시간이 길다고 그들은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서 할 일은 죽어서 묻힐 그럴듯한 묘와 죽은 영혼이 향수할 대량의 수장품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고구려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묘지 마련을 위해 분주히 뛰었고, 임금은 즉위하면 능을 쌓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초기와 중기의 무덤은 돌로 쌓은 것이므로 평민 백성의 묘는 작고 부호와 고관대작들의 무덤은 컸다. 임금의 무덤은 장수왕릉처럼 우람한 언덕을 이루어서 산봉우리에 가히 비할 만했다. 

청나라 말기, 이곳에 이주해왔던 사람들이 이 거대한 무덤을 발견하고 붙인 이름이 장군총이다. 무지한 그들은 일찌기 이곳에 동방의 강국 고구려가 있었음을 알 수 없었던바 중국의 변방을 지키던 어떤 장수의 무덤으로 넘겨 짚어진 것이다. 그것이 구두에 올라 이제는 습관적으로 장군총 장군분 장군무덤 등으로 불려진다. 기실 그것은 왕릉인 것이다. 

집안 평야의 동북쪽에 토구자산 기슭의 대지 위에 서남향으로 자리한 장수왕릉은 방대형이다. 높이는 12.40미터, 한 변의 길이는 31.58미터이다. 밑면적은 약 960평방미터이고 윗 면적은 270평방미터이다. 커다란 화강암을 계단 형식으로 쌓아올린 무덤무지는 웅장하면서도 안정감을 준다. 

장수왕릉을 쌓는 데 든 돌은 무려 1천1백여 개로서, 길이가 5.7미터, 너비가 1.12미터, 두께가 1.10미터의 일정한 규격의 화강암이다. 매 층에는 잘 다듬은 화강암을 3~4개씩 포개 쌓았고, 밑돌은 위에 포개놓은 돌보다 얼마간 나오게 하고, 또 홈을 파서 밀려나가지 않도록 맞물려 놓았다. 이러한 수법은 고구려에서 많이 쓴 축조양식으로 성 건축에서도 널리 적용되었다. 

집안현은 석재 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주위의 노령산맥에는 석면 석묵 활석 중정석 안로석 대리석 갑장석 석회석 수정석 백운석 규석 화강암 등이 대량 분포해 있다. 집안시에는 마을 이름까지 돌로 인해서 지어지기도 했다. 청석진의 원래 이름은 상투인데 화강암청석이 유명해지면서 바뀌어졌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고구려 무덤의 석재는 노령산맥의 오녀봉 채석장에서 왔다고 한다. 오녀봉은 집안에서 통화 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다섯 개의 험준한 산봉우리가 솟아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녀봉의 암석은 암황색의 대리석이다. 질이 좋아 견고하면서도 쉽게 쪼개지고 쉽게 다듬어진다. 고증에 의하면 장수왕릉이며 태왕릉이며 천추묘 등 고구려의 왕릉의 석재는 바로 여기에서 캐낸 것이다. 

오늘날처럼 기중기도 없고 자동차도 없었던 당시에 거대한 석재는 어떻게 운반했을까? 봄부터 가을까지 돌을 캐서 다듬고 겨울이면 얼음과 눈판으로 운반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흙을 쌓고 통나무 위로 돌을 굴려 올리는 방법으로 거대한 능을 쌓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