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피에로의 옷과 같은 세계, 질 들뢰즈

이춘아 2021. 11. 27. 06:41

이동희,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철학 이야기], 휴머니스트, 2010.

‘피에로의 옷과 같은 세계, 질 들뢰즈’

미셸 푸코는 질 들뢰즈(1925~1995)에 대해 “어느날 이 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선언한 적이 있다. 들뢰즈는 이에 대해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웃게 만들고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격노하게 만들려는 의도를 지닌 농담”이라고 반응했다. 

그러나 푸코의 선언은 맞아떨어졌다. 들뢰즈를 옹호하든 비판하든, 그를 제대로 이해하건 안하건 간에 그를 빼놓고 현대 철학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으니까. 그런 들뢰즈가 1995년 11월 4일 파리시내 자신의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 프랑스 지식인 계층에서 자살은 충격적이기는 해도 아주 드문 사건은 아니었다. 그래도 생성과 긍정의 철학을 이야기했던 들뢰즈가 자살을 선책했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이유를 궁금해했다. 그러나 그가 왜 자살을 선택했는가에 대한 개인적인 이유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추측해볼 수 있는 정황은 있다. 들뢰즈는 평생 고질적인 호흡기에 의지해왔고, 죽기 얼마 전에는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며 침대에 누워 지냈다. 그는 그런 삶을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에 그는 [경험론과 주체성](1953)에서 자살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었다. 

자살하는 자는 자연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말하는 방식을 바꾸면 자신의 창조자를 거역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연이 그에게 남겨놓아 준 유리한 길을 선택해 이 자연의 충동에 따르는 것이다… 죽는 것으로 우리는 자연의 명령의 하나를 완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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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흄을 통해 ‘관계’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관계는 하나의 원리나 중심으로 통합되는 변증법적 통일이나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하고 교통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와’ 같은 ‘접속사’는 그러한 ‘관계’를 나타낸다. 이런 접속사로 연결된 문장은 ‘A는  B다’라고 하는 동일률에 기초한 문장과 다르다. ‘A는 B다’라는 것은 동일성을 전제로 하거나 A의 B의 귀속을 나타낸다. 동일률은 타자를 일체화하거나 통합한다. 접속사로 이어지는 관계는 그런 동일률에 기초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것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시켜준다. 들뢰즈는 흄을 “접속사를 해방하고, 관계 일반에 관해 고찰한” 철학자로 이야기한다. 그는 흄에게서 이렇게 관계의 사상을 읽어낸다. 이 관계의 사상은 통합하는 원리와 중심을 갖지 않는, 따라서 전체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단편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 세계는 피에로의 옷처럼 잡다한 색깔을 가진 여러 가지 천을 꿰매어놓은 그런 세계 같은 것이다. 이 관계의 사상은 리좀의 중요한 핵심 내용이기도 하다. 그는 가타리와 더불어 [천개의 고원]에서 리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관계이며, 오직 결연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 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그리고  …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원래 리좀은 식물학에서 뿌리를 한곳에 깊이 박는 식물류가 아닌 담쟁이처럼 자신의 줄기와 뿌리가 같이 이어져 나가는 식물류를 가리키는 말이다. 리좀과 대비되는 것은 나무이다. 나무는 줄기로부터 가지, 가지로부터 다시 작은 가지로, 중심으로부터 거리에 의해서 정해지는 서열이 있다. 그러나 리좀은 전체를 통합하는 중심도 계층도 없다. 한없이 연결되고, 만나서 다시 새롭게 생겨나게 하는 연쇄가 있을 뿐이다. 사실 서양의 학문에서 중심과 부분을 구분하고 질서를 나타낼 때 흔히 나무에 비유하곤 했다. 데카르트는 [철학의 원리]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피코에게 편지를 쓸 때 학문의 체계를 나무로 설명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온 철학은 하나의 나무와 같다. …… 그 뿌리는 형이상학이요, 그 줄기는 물리학이요, 또 그 줄기로부터 뻗어 있는 가지는 다른 여러 과학이다.”

이 리좀이란 개념은 나무의 질서와 대비된다. 리좀은 철학적으로는 그동안 본질, 존재, 목적론적 과정 등의 개념을 통해 모든 하위의 것을 일사불란하게 질서 잡고자 했던 주류적 철학의 전통을 전복시키는 개념으로 생각된다. 리좀은 정치적으로는 단일한 자기 동일성의 확립을 통한 우열을 짓고, 타자를 복속시키는 체제와 질서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리좀은 비본질적이며 동일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리좀이 단순한 혼돈과 혼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리좀은 이질적인 규칙과 배열과 운동에 의해 정의되는 다른 질서다. 리좀의 개념을 사회에 적용해볼 때, 리좀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들의 한없는 연결과 접속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