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불꽃 같은 투쟁에 요절한 박원희 김사국 부부
이춘아
2021. 12. 12. 05:59
불꽃 같은 투쟁에 요절한 박원희 김사국 부부
박원희 김사국 부부는 둘 다 사회주의 운동가로 여성해방과 민족독립을 위하여 젊음을 불살랐다.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열성적으로 활동하다 남편 김사국이 먼저 병사하고 얼마 가지 않아 박원희도 갓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그 뒤를 따랐다. 박원희 김사국의 외딸 김사건(史建)은 ‘역사를 세운다’는 뜻으로 부부가 이름을 붙였다.
박원희(1898.3.10~1928.1.15)의 본적은 서울이라 하나 1898년 충남 대전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능란한 재주로 항상 우승의 성적을 거둔 그는 성격은 열정적이면서도 신중하여 무엇을 하기로 하면 끝까지 꿋꿋하게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전에는 침식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학교에 보내주지 않으려는 모친에게 단식 투쟁으로 맞서 끝내 허락을 받아냈고 서울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철원보통학교 교원으로 3년간 근무하고, 1921년 7월경 김사국과 결혼한 뒤에 민중을 위해 일하려면 공부가 더필요하다는 생각에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밤에는 양복직공으로 학비를 벌고 낮에 학교를 다녔다. 2년 후 귀국하여 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에 참가했으며, 다시 간도로 가 교원 생활을 하며 그곳에서도 청년 교양운동에 투신하였다.
당시 용정촌의 사립 동양학원의 교사 방한민과 학생 12명이 1923년 12월 경편철도 개통식을 계기로 일제의 간도 각 사령관과 관리들에게 폭탄을 던지고 암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방한민 등 10여명이 체포, 검거되었다. 이때 김사국이 연루되어 체포되고, 박원희도 같은 해 8월에 체포되어 기소 유예되었다. 두어달 투옥생활로 고생하였는데, 임신 중이었다. 이 아이가 유일한 딸이 되었다.
박원희의 1924년 이후 수년간의 활동은 의욕이 넘쳐났다. 1924년 4월21일부터 24일까지 개최된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 마지막 날 25명의 중앙집행위원 선출에 여성으로는 단 한명 들어갔다. 조선청년총동맹은 서울청년회, 북성회 및 신사상연구회계의 합작으로 좌익청년운동단체의 전국적 통합체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5월 4일 서울 재동에서 열린 조선여성동우회의 창립 발기인이 되었고, 이어 1925년 1월 북풍회 등 해외파와 의견을 달리한 서울파 즉 국내파 중심의 경성여자청년회를 조직,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허정숙, 우봉운, 주세죽 등이 1925년 1월18일 경성여자청년동맹을 창립하자 박원희, 김수준, 김숙정 등이 곧이어 경성여자청년회를 2월21일 창립하여 갈라선 것이다. 임시회장에 박원희, 집행위원으로 자신은 물론 김수준, 박춘자, 김숙정, 문정애, 박숙자, 이정숙이 선출되었다. 동회는 일반여성운동자들의 총의를 규합하려는 목적에서 경성여자청년동맹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강령을 내걸고 계몽주의적 색채가 짙었다.
그는 이 조직에 대해 “우리회의 취지”를 [동아일보]에 발표, “부인의 독립과 자유와 모성 보호의 실현을 도모하는 조선의 딸들아 굳세게 뭉치자”고 호소하였다. “여성의 현실을 첫째, 현 사회는 부인의 인격 존재를 부인합니다. 둘째, 부인에게 헌법상 및 민법상의 모든 권리를 빼앗았습니다. 셋째, 부인을 육아와 생산의 유일한 기구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모성보호에 관한 하등의 시설이 없이 생산의 전후까지 가혹한 노동을 합니다.”라고 분석한 뒤 사회주의 사회 건설만이 근본적 여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경성여자청년회 강령을 명시하였다. 즉 “아동은 부인의 독립과 자유를 확보하며 모성보호와 사회상에 재한 남녀지위의 평등인 사회제도의 실현을 기함. 아동은 부인해방에 관한 사회과학상의 교의를 분명케 하며 이를 보급함을 도모함”이었으며, 당시 회원은 50명이었다.
사회단체와 여성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중에서도 박원희는 주로 강연을 통한 대중 교육에 나섰고 임원을 맡아 언제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26년 병사한 동지 남편의 뒤를 이어 아이를 키우며 1927년 근우회 창립과 강연 등 여전히 여성의식향상과 민중계몽 운동에 온힘을 쏟았다. 결국 1928년 1월5일 사망 때까지 여성운동에 헌신하고 겨우 30년 남짓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혼신을 다한 열성적인 실천력이 자신의 건강을 해치고 죽음으로 몰아갔다. 김사국이 망명하였을 때 혼자 아이를 키우며 여성운동에 참여하였고, 남편의 간병 중에도 남편이 죽은 뒤에도 4살 된 딸을 업고 다니며 사회운동에 전심 전력하였다. 말 그대로 김사국의 몫까지 자신이 한다고 총력을 다한 결과 2주일 정도의 감기를 이기지 못하고 1928년 1월5일 서울 시내 계동 125번지에서 31세로 요절하였다.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 받았다. 2020년 지금은 남편과 합장되어 대전 현충원 애국열사묘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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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건 여사 고희기념문집], 문경출판사, 1994.
내가 태어난 곳은 친가가 아닌 외가댁이었다. 2살에 독립운동을 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살 되던 해 12월13일(음력)에 역시 독립운동을 하셨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고아가 된 후 나는 외조모님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독립운동하시다 부모님도 돌아가셨다는 것도 내가 어느 정도 철이 들어서였다. 내가 지금 아련하게 떠오르는 첫기억으로는 어느 겨울 날 이종사촌 오빠에게 업혀서 어딘가를 갔는데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앞에 어머니 사진이 걸려 있었다. 오빠 등에 업혀 돌아올 때 밤하늘에 별이 반짝였다.
후일에 안 일이지만 내가 갔던 곳은 교동에 있는 천도교 강당에서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1주년 추도식에 참석했었다는 것이었다. 3살되던 해 12월 13일에 돌아가셨으니 1년 후인 4살 나던 해 12월 13일이다. 이것이 나의 출생 이력이다
나는 비록 부모님은 안계셨지만 외할머님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남부럽지 않게 자랐다. 넉넉한 외가댁이고 개화된 집안이었으며 외조모의 사랑이 지극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은 여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그림 그리기, 책 읽기, 붓글씨 쓰기였다. 내가 외가집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고 있었으나 어린 나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스님이 되신 친할머니와 정신이상이 된 숙부가 계시다는 사실이다. 친할머니는 가끔 오셔서 나를 보고 가셨다. 일제의 갖은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된 삼촌도 더러 만났다.
“사건아, 네가 너의 애비를 꼭 닮어서 보러 온다. 그동안 잘 있었니?” 그러나 가끔 오시는 친할머니가 나는 아주 싫었다. 어느 때는 학교로 오셔서 물끄러미 처다보고 계시는 것이다. 나는 그 때 싫었던 생각이 지금까지 생생하다.
나의 할머님께서는 할아버님이 소실을 얻어서 아버지와 삼촌을 업고 금강산에 있는 절로 가셨다고 한다. 독선생을 두고 두 아들에게 공부를 가르치셨다고 한다. 아들 형제를 독립 운동을 하시도록 장하게 키우셨으니 큰아들은 옥사를 했고, 둘째는 고문으로 정신 이상이 되었으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러나 불쌍한 우리 할머니시지만 그 때는 어려서 그런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스님의 모습으로 할머니가 나는 보러 오시는 것이 싫기만 했다.
재동국민학교 졸업을 앞두고 집에서는 경기여고를 가라고 하신다. 그러나 선생님은 숙명여고를 가라고 하셨다. 숙명여고에 응시했으나 시험에 떨어졌다. 2차로 어디를 볼까 하다가 여연구언니와 여난구가 배화여고를 다니는 것을 보고 배화여고에 응시했다. 배화여고에 들어가자, 외숙부께서는 시험 볼 때도 데리고 다니시며 공부 잘하면 대학을 보내 준다고 하셨다. 나중에알고 보니 어머니가 일본 유학하고 오셔서 중학교 선생님으로 계셨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는 경기 여고를 졸업하시고, 이화전문학교에 입학하셨으나 배울 것이 없다 하시며 그만 두시고 일본 유학까지 갔다 오신 분이다. 그런 아버지, 어머니이신지라, 내 이름을 김사건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역사를 세우라고 사건이라고 하셨다고 한다. 나는 항상 마음에 책임감을 느꼈다. 무엇을 해서 역사적인 인물이 될까 하고 생각했다. 일본놈을 윤봉길 의사나 안중근 의사처럼 죽여 버릴까도 생각했다. 학교에서도 내선일체를 부르짓는 일에 반항하여 미움을 샀다.
졸업을 할 무렵 미술 선생님이 동경미전을 가라고 하신다. 그러나 배화여고2학년 때 외숙부께서 돌아가셨다. 4학년 때 외할머니께서도 돌아가셨다. 너무나 큰 슬픔이었다. 나를 대학까지 공부시켜 준다는 외숙부와 외조모가 세상을 뜨셨으니 동경유학은 이룰 수가 없었다. 배화여고 졸업으로 끝을 맺어야하는 학창생활이었다. 배화여고를 졸업하고 바로 조선총독부 통계국 집계계에 취직을 했다.
일본에 갔던 친구들이 다 돌아오고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가 되면서 한국처녀들을 정신대로 데려 간다는 말이 항간에 시끄러울 때였다. “사건이 너는 어서 결혼을 해야 하겠다.” 이모님께서그 무렵 부쩍 서둘기 시작하면서 나는 결혼이라는 문제에 부딪혔다.
원서정에서 양복점을 하시는 이모님께서 양복점에 오는 손님마다 혼처를 물색해 달라고 이리 저리 청을 넣을 때였다. 그 때 이모님 수양 동생이 상업은행에 다니는 남자였다. 그 분이 좋은 신랑감이 있다고 하면서 데리고 온 사람이 바로 오늘날까지 함께 사는 ‘김상태’씨였다.
1944년 1월7일 드디어 결혼식을 했다. 청년회관에서 결혼식을 마친 후에 화월회관에서 피로연을 했다. 서울역에서 천안가는 기차를 탔다. 천안서 온양가는 기동차를 타고 온양에 도착해서 탕정관이라는 여관에서 하루를 묵고 기동차를 타고 예산에 왔다. 예산 시외가댁에서 하루를 유했다. 카바이트 정기버스가 칠갑산 상상봉에서 발동이 꺼졌다. 차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내리라고하여 내려보니 이리봐도 절벽 저기를 봐도 절벽 뿐이었다. 서울에서 도봉산도 가보았고, 관악산도 가 보았지만 이렇게 사방이 절벽이고 눈으로 덮여 있는 곳은 내생전 처음이었다. 서울로 가는 차만 있으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심정 뿐이었다. 차를 타고 내린 곳은 정산이다. 정산에 와 내리니 그림에서나 보던 사린교가 와 떼메고 갈 하인들이 기다고 서 있었다. 하인들이 메고 걷는 바람에 가마는 심하게 흔들거렸다.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어지럽기만 했다.
서울보다 추위도 좀 덜했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중에는 맨발인 사람도 있었다. 얼굴은 어린 아이 같은 데 돌아서는 것을 보면 쪽진 것이 사발만했다. 나는 기가 막혀서 저런 어린애를 시집 보냈을까 하고 생각하니 우습기만 하다. 내가 생전 처음 보는 것뿐이다. 내가 살던 서울에서 별천지로 온 느낌이다. 불안하기만 하다. 하루가 지나고 삼일을 문안드리고 서울 외사촌 오빠가 출정하다고 해서 서울로 왔다. 나는 계동에 있고 그이는 하숙집으로 갔다. 며칠 동안의 일들이 꿈속에서 있었던 일인 것 같아 까마득하기만 했다. 다시 직장생활이나 하고 싶었고 처녀 때 살았던 대로 그림을 그리면서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서울에다 집을 마련할 동안 시골집에 가서 있기로 했다.
시골로 가기 전날 나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갔다. 아버지와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눈물만이 나오고 부모님을 그리는 정이 가슴에 복받쳐서 그대로 주저 앉고 싶었다.
4월에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약간의 식량을 가지고 정산까지 6km를 걸어 나와서 공주가는 차를 탔다. 공주서 조치원까지 가는 차를 다시 갈아 타고 그곳에서 서울로 가는 차를 또 다시 갈아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 얻어 놓은 집은 이모님네가 사시는 집의 건너방이다. 방하나와 부엌이라고 혼자 들어서도 좁은 그 곳. 거기다가 큰 시동생을 데리고 있어야만 햇다. 그래도 서울에 다시 온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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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2월, 어느 날 TV에서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 중 아직 유공이 인정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포상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반가운 것은 사회주의 경향의 사람들도 독립유공자로 발굴해서 표창한다는 것이다. 친정 부모님께서 나라 위해 독립운동을 했으면서도 아직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늘 한이었다. 독립 운동을 한 장소가 중국과 소련이라서 그렇지 친정 부모님이 어찌 사회주의 쪽이겠는가 하고 생각하니 나라 위한 일편단심일 뿐 그들에게는 아무런 흠도 없는 분들이었다.
나는 그 소식을 접하면서 친정 부모님들의 명예 복귀가 된다는 말에 너무너무 기뻐 눈물이 흘렀다. 해당자는 신청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날로 김영삼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써서 보냈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쓰러지신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가 빛을 보게 된다니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 정말 다행스러웠다. 나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탄원서를 올린 후 1개월쯤 지나 청와대 민원실에서 독립유공자 신청서가 왔다. 서류를 살펴보니 여러가지 구하기 힘든 자료나 서류를 첨부하라는 것이었다. 분명한 사실이나 내가 너무 어렸을 때 돌아가신 부모이기 때문에 증빙될 자료를 찾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내가 아프지 않으면 다니면서 증빙자료를 찾겠지만 몸이 아파서 어쩔 수도 없었다. 바쁜 농사철이 지나면 서울에 가서 해오기로 했다. 74세된 남편이 농사일을 하고 있었지만 장인장모를 위해 앞장 서주었다. 나의 어린 유아 시절 부모님을 잃고 고아가 된 사진까지 신문에 나와 있었다. 친정 어머님이 쓴 논문도 신문에 실려 있었다. 나는 감개가 무량하였다. 이렇게 훌륭하신 부모님을 다 여의고 70이 다 될 동안 갖은 역경과 싸우며 산 것을 생각하니 이것도 하느님의 뜻이 아닌가.
서류를 다 완비해서 부여 보훈처에 제출하였다. 잘 될지 안될지는 모르지만 전심전력을 다 했으니 결과만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어서 빨리 친정 부모님의 독립 유공이 인정되어 지하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보고 싶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외할머니의 뜨거운 사랑 속에서 불행을 모르고 성장했다. 19세에 김상태씨와 1944년 결혼하고 금년(1994년)이 결혼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뜻이 이곳 산간벽촌으로 결혼하게 하여 가정을 재건하고 이웃을 돕도록 하는 데 있었다. 나는 생명을 불태우며 전심전력하며 내 인생을 지금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