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시달린 세상을 알리고저

이춘아 2021. 12. 25. 00:05

한도신 기록(김동수 오연호 정리), [꿈 갓흔 옛날 피 압흔 니야기], 돌베개, 1996.

시달린 세상을 알리고저


“이제는 늙은 탓인지 글을 쓰던지 책을 보던지 한 후에는 잠을 잘 수가 없다. 
죽기 전에 자서던을 다 쓰야겟는데 아직도 삼분지 일도 쓰지 못했다. 
일 다한 무덤 업다고 하는 말이 올다. 
이 자서던도 쓸 것시 막연하다. 왜 그런지 힘들고 정신이 몽롱하고 어즈럽다.
쓸데업는 지난 일이나 후세에 시달린 세상을 알니고저 하는 것신데…”

- 고 한도신(1895~1986) 여사의 일기 1968년 7월21일자에서


정리자의 말 - 역사를 사는 여인

한도신 할머니를 만난 것은 7개월 전의 일이었다. 미국 버지니아주 노폭주립대학에 부부 교수로 계시는 김동수 백하나 님 댁에 들렸다가 너무나 매혹적인 할머니 한 분을 만나게 된 것이다. 한도신 할머니는 1986년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는 안계셨지만 나는 두 교수님이 내놓은 대학노트 뭉치를 보자마자 곧 그 할머니에게 빠져들게 되었다. 대학노트에 원고지 1,200매 분량을 촘촘히 기록해놓은 할머니의 수기를 하룻밤 만에 정독한 후에 나는 보물단지를 발견한 양 흥분했다. 이 글의 정리를 마친 지금 나는 왜 그 첫날밤 할머니에게 그토록 매료됐는지 곰곰히 생각해본다. 

그렇다. 무엇보다 나는 큰 스승을 만난 것이다 8년간 기자로 일해온 나는, 저널리즘을 공부한다고 미국까지 건너온 나는, 뜻하지 않게 글쓰기의 큰 스승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글 쓰는 이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것 세 가지만 든다면 그것은 성실성, 솔직함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일 것이다. 한도신 할머니는 1962년부터 1976년까지 약 15년에 걸쳐서 이 글을 기록했다. 또한 글뿐만 아니라 관련 신문자료와 당신의 목소리를 녹음한 20여개의 테이프도 남겼다. 한자 한자 기록하는 데 쏟아부은 정성이 어떠했을리라는 것은, 대학노트에 씌어 있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정연한 글씨를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장면마다 당신이 체험하고 알고 있는 최대한의 것을 기록하려고 애쓴 흔적도 역력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글쓰기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할머니가 쓴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할머니를 글쓰기의 큰 스승으로 받들게 된 것은 당신의 솔직함이었다. 독립운동가 영웅들의 뒷모습, 남편이 바람 피운 이야기, 집안 싸움 등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양 드러내셨다. 할머니 글 중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런 사정은 그 동안 나 혼자만 알고 있던 것이다. 이 글을 보고 웃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흉볼 이도 있을 것이다. 혹 이런 실정을 동정할 이도 있을 줄 안다. 천만 명이 비방해도 나는 실정을 그대로 쓰는 것이다. 가감이 없다.”

나는 역사적 증언으로서의 진실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 되도록 할머니가 쓴 글을 그대로 살려 옮겨놓았다. 다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할머니가 남긴 다른 자료들을 활용해 글의 전후를 재구성하고 부분적으로 묘사와 서술을 보탰다. 

이 책은 한 여인이 가슴으로 쓴 한국사이다. 

여기에 할머니가 남긴 글의 사본은 연구 목적으로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연구실과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회사 자료연구실에 보관되어 있음을 밝혀둔다. 

글쓰기의 큰 스승을 만날 기회를 주신 두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1996년 2월
오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