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재봉틀로 만든 태극기
이춘아
2021. 12. 25. 23:46
재봉틀로 만든 태극기
내가 장질부사를 앓고 난 뒤 얼마 지나 시댁은 평양 장별리로 이사하였다. 이사하자마자 시아버지는 정미소를 차렸다. 옆집 송영수 할아버지네하고 돈을 보태 동업을 한 것이다. 시아버지는 날마다 선창에 벼 사러 나가시고, 사무실에는 송영수 할아버지께서 계시고, 서기를 그 집 큰사위가 보았다. 일꾼은 열여섯 명이었다. 낮에 여덟명, 밤에 여덟 명이 주야로 벼를 찧었다.
그러다가 그 할아버지네가 그만둔다고 하여서 시아버지는 우리 친정집과 동업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친정아버지께서 시댁으로 들어와 수삭째 머무르셨다. 시아버지와 친아버지를 다 모시게 됐으나 정미소가 잘 된다고 웃음꽃이 피던 때라 힘든 줄을 몰랐다. 그때는 대개 당나귀로 쌀을 빻던 때라 전기 정미소는 새 기술과 기계를 쓰는 사업으로 수지가 좋았다. 그때 함께 식사하는 식구가 꼭 서른 명이었다. 식모를 둘이나 뒀어도 밥을 해대기가 바빴다.
남편은 제남교회 전도사로 나가 있어 서로 떨어져 있었으나 남들이 부러워하던 때였다. 혹 소풍 삼아 쌀 고르는 데 나가면 쌀고르는 여자들이 나를 참 팔자 좋은 색시라고 부러워했다. 그 칭찬과 부러움받던 복이 몇달을 못 가고 가련한 팔자로 전락해버렸다.
1919년 기미년 2월 중순께, 남편은 다시 숭실전문학교에 다니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셨다. 바로 복학 수속을 마치고 또 평양신학교도 겸할 수 있다고 해서 그곳 입학 수속도 준비했다.
그믐날 밤이었다. 학교에 볼일 보러 간다고 나갔던 남편이 다른 학생 수 명을 데리고 불쑥 안방으로 들어오셨다. 다른 때 같으면 이이는 누구이고 저이는 누구라고 인사도 잘 시켜주었건만 그날은 그런 것도 없이 나를 재봉틀이 있는 건넛방으로 데리고 갔다.
“이거 태극기 형상대로 재봉 좀 해주오.”
남편은 넓고 긴 당목 한 두루마리를 재봉틀 위에 얹어놓고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무엇에 쓰시려는데요?”
전에 없던 일이라 도무지 짐작이 안 갔다. 같이 들어온 학생들 얼굴이 무슨 일을 저지를 사람들모양 굳어져 있는 것을 봤는지라 걱정이 아니 될 수 없었다.
“당신은 알지 않는 것이 좋아요. 힘 닿는 데까지 아주 크게 재봉질 해주시오.”
남편은 일부러 태연스레 말하려 해도 얼굴에 상기된 표정이 배어 있었다. 내가 더 물어보려고 하자 남편은 돌아서 안방으로 건너가 버렸다. 발소리를 죽여 안방문 앞으로 갔다. 참빗 틈새기만큼 벌어진 문틈에 눈을 갖다 대고 무슨 사단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살폈다.
남편이 윗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태극기 견본이었다. 어디서 마련해왔는지 다른 학생들이 종이 두루마리를 방 한가운데에 펼쳤다. 학생들과 남편은 태극기 견본과 종이를 빙 둘러사고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남편이 입을 열었다.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각자 마음 속으로 기도할 사람 기도하고 맹세할 사람 맹세합세다.”
그제서야 짐작이 갔다. 일본 사람들한테 대들려고 그러는구나.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 대드는 방법이 만세운동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감히 조선에 독립을 달라고 할 줄은 몰랐다. 그냥 숭실전문학교에서 몇 명이 모여 일본 사람들의 정치를 비판하려나보다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도 어디 예삿일이랴, 안방에서 침묵의 기도와 맹세가 시작되자 나는 나도 모르게 문틈을 엿보는 자세 그대로 기도를 드렸다.
길고 긴 기미년 2월 그믐밤을 꼬박 샜다. 나는 당목에 큰 태극기 재봉을 계속하다 새벽녘에 집안 다른 식구들 몰래 밤참을 만들어 안방 사람들을 대접했다. 안방 사람들은 태극기를종이에 그려 대나무 꼬챙이에 매달아 수기를 만들고 있었다. 방 한쪽에 웬 가마니가 있어서, 그이들이 밤참 먹느라고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거들더보았더니 이미 만든 수기 수백 개가 들어 있었다. 일을 크게 벌이려나보다 하는 생각이 드니 더 걱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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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떡일어나 대문을 나서니 나팔소리 북소리 만세소리 분간할 수 없는 요란한 소리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오니 “대한독립만세”라는 외침이 한 목소리로 똑똑히 들린다.
무슨 소린가 하고 나처럼 멍하게 귀를 세우고 있던 집안 정미소 일꾼들이 갑자기 물동이로 벼락을 맞고 확 정신이 깬 사람들처럼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뛰쳐나갔다. 어느샌가 시아버지도 나가시고 없었다. 정미소 방아소리도 멎고 일꾼들은 다 나가고 아무도 없었다.
시할머니도 “나도 나가봐야겠다”면서 지팡이를 짚고 나가신다. 가다가 검정고무신 한쪽이 벗겨졌는데 다시 신지 않고 지팡이 짚은 손에 움켜쥐고 나가시면서 뒤를 보고 외치신다..
“너희 둘은 집을 지키고 있어라. 내 가서 아들 손자 찾아 올 테니끼니.” 그래서 시어머니하고 나는 집을 지키고 있었다.
밥때를 넘겨 조금 있으니 만세소리가 아우성소리로 변하고 탕탕탕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끝내는 만세소리는 간데없고 총소리와 “아이고 아이고” 우는 소리만 들렸다.
한참 있다가 시할머니와 시아버지가 헐레벌떡 들어오셨는데 모두 너무 열심으로 만세를 불러서 목이 다 쉬었다.
“선명이 아바지는요?”
계속되는 총소리에 놀란 내가 벌벌 떨면서 묻자 시할머니는 “우선 찬물 한 그릇 달라우” 하신다. 찬물을 두 중발 떠 시할머니와 시아버지께 드렸더니 마당에 선 채로 벌떡벌떡 다 드셨다. 시할머니가 빈 물중발과 함께 마당에 그냥 푹 주저앉으시면서 이러신다.
“선명이 아바지는 잘 됐다.”
“예? 잘 되다니요?”
시아버지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셨다.
“선명이 아바지는 숭실 학생들과 함께 아침에 제일 먼저 잡혀갔다. 그게 더 다행이다. 지금 길거리에서 만세 부르는 사람들한테는 총질해서 다 죽인다. 어디 총질뿐이냐? 몽둥이, 삽, 곡괭이, 갈쿠리로 모조리 때려 죽이고 야단이야.”
이렇게 평양 시내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이 나중에 알고 보니 13도 방방곡곡에 퍼졌다. 시골서는 농사도 안 짓고 만세 부르는 것으로 일 삼으며 계속했다. 자기네 식구가 잡혀갔든지죽었든지 하는 집과 친척들은 목숨 내놓고 악이 올라서 날마다 만세를 부르니, 목이 쉬어 말을 못해 손만 내두르는 사람이 거반이었다. 이런 형편이 되자 암정 감옥소와 남문밖경찰서, 파출소마다 잡혀간 사람들로 꽉 찼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가기는 평양이 생긴 이후 처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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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남편은 구사일생이 계속되는 파란곡절의 인생을 사셨고 나도 곁에서 그 모든 것을 체험했다. 밥 굶을 걱정 없는 평안한 가정에 시집갔다고, 복 많은 색시라고 귀가 아프게들었던 것이 엊그제였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