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백남준 예술의 키워드
이춘아
2022. 1. 9. 07:43
백남준 예술의 키워드
01. 전위음악
누나 곁을 맴돌며 어깨너머로 피아노를 접하던 백남준(1932~2006)은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는 이건우에게서 작곡을, 신재덕에게서 피아노를 사사했다. 어린 백남준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이건우는 그에게 쇤베르크 음악을 알려주었다. 덕분에 쇤베르크 작품 세계에 눈을 뜨게 된 백남준은 서양음악의 토대인 장조와 단조를 없애고 무조음악을 시도한 것은 물론 한 발 더 나아가 12음 기법을 고안한 쇤베르크에게 큰 충격을 받으며 점차 그의 음악 세계에 심취했다.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도 쇤베르크 연구를 이어나가던 그는 독일로 건너가 전위음악을 천착하다가 일상의 소음이나 침묵도 음악이 될 수 있다고 설파한 케이지를 만나 혁명에 가까운 사고의 전환을 경험했다.이후 케이지의 음악 세계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제작하거나 퍼포먼스를 통해 그에 대한 오마주를 선보였다.
02. 미디어아트
매체는 라틴어 ‘medium’에서 파생한 말로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등과 같이 어떤 사실이나 정보를 담아서 수용자들에게 보내는 역할을 하는 매개체를 의미한다. 역사상 백남준만큼 다양한 매체로 작업한 예술가도 드물다. 그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로인한 사회의 변화를 예민하게 포착했다. 백남준은 텔레비전을 시작으로 인공위성에 이르기까지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 깊숙이 침투하며 우리 삶의 일부분으로 자리한 대중매체를 예술의 오브제로 만들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03. 선 사상
10대 때부터 동양철학에 빠졌던 백남준은 일본으로 이주한 후에 본격적으로 선 사상을 천착하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끊임없이 화두를 던지면서 깨달음을 얻어나갔다. 예술가가 된 이후에는 선 사상을 모티브로 하는 ‘TV 부처’ ‘백팔번뇌’ 같은 작품을 선보였다. 불교와의 인연으로 백남준이 세상을 떠난 후 서울에 위치한 봉은사에서 그의 추모제가 열리기도 했다.
04. 노스탤지어
1950년 전쟁의 참화를 피해 등 떠밀리듯 한국을 떠났던 백남준은 종종 고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고국과 가족에 대한 향수나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 영감을 얻곤 했는데, 그의 기억에 자리한 특정 날짜를 이용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말년에 그가 남긴 작품들을 보면 유년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백남준은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품게 되는 노스탤지어가 단순히 기억을 끄집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마치 타인이 우리에게 주는 피드백 못지않은, 혹은 그보다 훨씬 더 큰 깨달음을 일깨울 수 있다고 믿었다.
05. 플럭서스
플럭서스는 1960년대 초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으로, 머추너스가 ‘플럭서스 국제 신음악 페스티벌’의 초대장 문구로 처음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장르를 엄격하게 구분 짓고 획일적인 예술관이나 작품 개념을 선보였던 기존의 예술 방식은 플럭서스 예술가들에게 도전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음악과 회화와 문학 등을 융합한 예술을 선보이며, 나아가 일상과 예술, 작가와 대중 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했다. 고정관념을 타파하려는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일상생활에서 마주할 수 있는 단순한 동작들을 무대에 올리며 새로운 예술의 형태를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퍼포먼스 에술의 등장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백남준과 보이스 등이 대표적인 작가다. 백남준은 비평가 아르멜린 리비어와의 인터뷰에서 플럭서스에 대해 “나는 플럭서스의 반 스타 기질, 협동적인 면을 좋아합니다. 플럭서스는 전례 없는 재능들이 모였던 집단이고, 전후의 흔하지 않은 예술 운동 가운데 하나였죠. 모든 문화적 국수주의가 배제된, 진실하고 의식적인 국제운동이었어요”(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238쪽)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06. 퍼포먼스
퍼포먼스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예술행동이나 표현 양식을 일컫는 말이다. 그 발상은 20세기 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과거의 전통과 학구적인 의식에 반대한 예술 운동인 미래주의, 기존의 모든 가치나 질서를 철저히 부정하면서, 비이성적이고 비심미적이며 비도덕적인 것을 지향하는 다다이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꿈이나 환영과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며 표현의 혁신을 꾀한 쉬르레알리즘, 건축을 중심으로 예술과 기술의 종합을 추구한 바우하우스의 예술 운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남준은 작품의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여, 그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연출한 제작 행위 자체를 강조했다. 동일한 구성의 공연이라고 하더라도 관객들에게 이전과는 다른 강도의 놀라움과 충격,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즉흥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백남준은 장르를 융합한 퍼포먼스를 통해 관객들의 시각과 청각을 교란했으며, 그동안 작품의 탄생 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던 수용자, 즉 관객들을 창작 과정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우연성이 뒤섞인 표현 행위 자체를 작품화하려고 시도했다.
07. 성
백남준은 문학과 미술에서는 성이 중요한 모티브로 쓰이는 것과 달리 음악에서 금기시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성을 소재로 한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임으로써 음악이 성스러워야 한다는 통념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이러한 그의 사고에서 기인한 퍼포먼스가 두 개 있다. 하나는 1962년에 탄생한 ‘젊은 페니스의 교향곡’으로, 이 퍼포먼스는 전후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자란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한 성 풍속도를 적나라하게 그림으로서 성이라는 사회적 금기를 깬 이시하라 신타로의 [태양의 계절]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백남준 스스로도 20년 뒤에나 이 퍼포먼스를 무대에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한 만큼 도발적인 내용으로 가득하여 뒤셀도르프에서의 공연 당시에는 스코어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또 다른 하나는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다. 1964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가깝게 지내던 무어먼에게 음악과 성을 결합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퍼포먼스를 제안했다. 뉴욕의 시네마테크 필름메이커스에서 선보인 이 공연에서 무어먼은 윗옷을 벗고 나와 외설죄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백남준도 연했되었다. 이 일로 예술계에서 에로티시즘이 전위인가 퇴폐인가를 두고 열띤 논쟁이 일어났으며, 두 사람은 예술의 자유를 대변하는 예술가로서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08 쌍방향 소통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전후의 세계 질서는 미국과 소련의 주도하에 냉전 체제로 재편되었다. 당시 두 나라는 이데올로기 대결과 정찰과 통신 등을 목적으로 군비 확장에 돌입하면서 막대한 국가 자본을 쏟아부었다. 1957년에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호 발사에 성공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미 항공우주국, 즉 나사 NASA를 설립했다. 두 나라를 주축으로 본격적인 우주개발 시대가 열리면서 인공위성은 냉전 체제의 산물로 여겨졌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백남준은 인공위성이 감시와 통제의 수단이 아니라 상호 소통적인 매체임을 보여주기 위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위성아트를 기획했다. 그는 소통이 미래 사회의 강력한 무기이고, 미래는 소통하는 자들이 지배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