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구로시오 해류가 만든 심청의 편력기
이춘아
2022. 5. 1. 06:09
이명원, ‘구로시오 해류가 만든 심청의 편력기’
고전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을 해양의 상상력과 결합시켜 새롭게 재구성해낸 황석영의 [심청, 연꽃의 길](문학동네, 2003)은 한국소설에서는 드문 해양적 상상력을 공간적으로 크게 확장시킨 작품이다. 이 소설 속의 심청은 인천 제물포에서 남중국의 난징과 진장을 거쳐 타이완의 지룽으로 이동하고, 거기서 다시 싱가포르를 거쳐 류큐, 나가사키, 제물포로 귀환하는 여정을 겪는다.
고전소설 [심청전]이 그렇듯 이 작품 속 심청 역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샤머니즘의 한 습속인 인신공희의 제물로 바닷길에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후 여러 형태의 우연과 필연을 거치면서 해상 교역로를 이동하는 인생 역정을 겪는다. 여기서 심청의 해상 이동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운명과 그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성립했지만, 그것을 가능케 한 조건은 구로시오 해류와 무역풍의 존재였다.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아편전쟁 직후의 서세동점의 상황이기 때문에, 심청의 인생 유전과 해상 교역로를 통한 이동은 이러한 문명과 역사의 격변을 구조적 규정력으로 삼아 전개된다. 소설 곳곳에서 독자들이 발견하게 되는 구미 열강의 증기선과 흑선의 존재는 바로 그것을 상징하며, 심청이 팔려왔거나 직접 경영하는 유곽에서 조우하게 되는 색목인들의존재는 ‘지리상의 발견’ 혹은 ‘대항해시대’로 구미인들이 명명하곤 하는 식민 제국주의가 아시아에 초래한 격동과 혼란을 드러낸다.
이 격동과 혼란 속에서 심청은 그것을 육체로 환원된 존재로서 수락하고 때로는 능동적으로 활용하면서 생존을 도모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판소리계 소설에서 출천대효의 상징이었던 심청이 창녀 또는 팜파탈로 형상화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논쟁적인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작가가 심청을 묘사하는 태도 역시 때로는 욕망의 주체로, 때로는 도구화된 객체로 전락시키기도 하는 등 다소 모순된 방식으로 드러나지만, 이러한 심청 표상을 통해 작가가 궁극적으로 그리려 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면서 소설을 읽을 필요가 있다.
심청이 거쳐왔고 또 거쳐가게 되는 바다와 공간은 근대 전환기 동아시아 권역에 불어닥친 거대한 역사의 변동을 암시한다. 난징에서 그가 목격한 아편전쟁 직후의 마비되고 타락해가는 중화제국의 풍경, 싱가포르에서 목격한 동인도회사를 포함한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적 함포외교, 일본의 메이지유신 이후한편으로는 사스마 한에 의한 류큐 침략이 가속화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페리의 흑선 도래에 따른 개항 압력에 직면한 류큐 왕국의 혼란, 나가사키에서 목격한 근대 전환기에 발 빠르게 대항하는 일본의 대외정책 등 이 소설은 구로시오 해류가 관통하는 한반도로부터 남중국해에 이르는 지역이, 어떻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쇠락하고 또 아亞 제국주의로 전환하고 있는가를 디테일한 풍속의 제시를 통해 잘 보여준다.
이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근대 전환기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명을 이해하는 구도로 작가가 대륙 중심의 서사가 아닌 해양 중심의 서사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동아시아사를 이해하는 기본 축도인 한국, 중국, 일본이라는 국민국가적 구분이 아닌 타이완, 류큐, 싱가포르와 같은 섬들 혹은 변경을 중심으로 한 심청의 이동을 그림으로써 아시아의 역사 전환 혹은 문명 전환이 결국 해양을 통한 서구 열강의 충격이라는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이 변경과 해양을 중심으로 한 상상력과 심청의 육체를 매개로 한 편력은 논리적으로 유사성을 지닌다. 이것은 남성화된 서구 열강이 여성화된 아시아 지역을 제국주의의 추동력으로 침략하고 지배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로서 기능하는데, 이때 심청은 이러한 문명으로 은유화된 남성적 폭력을 타고 넘어서는 일의 양가성을 잘 보여주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작가 황석영이 조명하는 심청은 궁극적으로 어떤 존재일까. 인신공희의 희생양이었다가 노예무역으로 팔려가고 그런 가운데 운명을 활용, 변신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해 그 자신이 유곽을 경영하기도 하지만, 결국 조선으로 귀향하는 이 존재는 누구인가. 심청이었다가, 연화였다가, 또 로터스로 자신의 이름을 끊임없이 바꾸는 ‘연꽃의 길’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소설의 종결부를 읽어보면 심청이 노환으로 죽음을 맞는 시점은 조선이 일본에 의해 망국의 운명을 맞는 시점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것은 심청이란 존재가 멸망해가는 조선의 상징이며, 심청의 동아시아 편력이라는 것을 통해 작가가 제시하고자 한 것이 해상을 통해 동아시아에 전개된 열강의 거침없는 식민 제국주의에 대한 조망이라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바꿔 말하면 황석영의 [심청, 연꽃의 길]은 조공책봉 체제를 기반으로 했던 중세의 동아시아 질서가 개항을 빌미로 한 서구열강의 식민 제국주의 질서로 이행하는 역사적 대전환을 심청의 육체에 가해진 폭력으로 은유하고자 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심청의 죽음과 조선의 망국을 겹쳐놓은 것은 이러한 작가적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터이다. 구로시오 해류의 경로를 따라 심청을 이동하게 만듦으로써 이러한 역사의 격변을 동아시아적 시야에서 확보하고자 한 작가의 서사 전략이 그대로 반영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