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이병주의 [지리산]

이춘아 2022. 5. 7. 07:19

김훈 박래부, [김훈 박래부 기자의 문학기행 1], 한국문원, 1997.

이병주의 [지리산]

(작품 줄거리)
1938년 겨울, 진주중 3년생인 박태영은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의 수필집을 읽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연행됐으며, 그의 절친한 급우 이규 또한 ‘진리의 사도가 되자’는 맹세를 함께 했다는 이유로 불려 간다. 그들은 일본인 하라다 교장의 “독립운동이나 공산운동을 못하도록 지도하겠다”는 보증으로 풀려난다. 그 책을 박태영에게 빌려 주었던 진주의 거부이자 인텔리 하영근은 이 두 청년을 아껴 그후로도 물심 양면으로 지원을 베푼다. 

박태영과 이규는 조선어 과목 폐지, 일본어 상용 철저, 신사 참배, 카키색 교복 강제 착용, 창씨 개명 등으로 이어지는 식민지 교육에 소극적으로, 때로는 적극적으로 저항하면서 중학교를 졸업한다. 

이규가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자 박태영도 도일, 우유 배달로 대학에 진학하지만 반도의 청년들에게 징병제가 실시되고 두 청년에게도 학도병 출진령이 다가온다. 1943년 12월 학병을 피해 지리산에 숨어서 일본이 망할 때까지 저항하기로 결심한 박태영은 시모노세키항에서 진주중 4년 선배인 하준규를 만난다. 하준규의 주례로 박태영은 동경에서 알게 된 애인 김숙자와 결혼식을 올린다. 김숙자는 일본에 남고 박태영과 하준규는 귀국하여 덕유산 은신골로 들어간다. ‘

징병과 징용을 피해 산으로 들어오는 젊은이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그들은 경찰 수색대에 대항하기 위해 무술을 연마하고 하영근에게서 빈 총으로 무장한다. 인원이 50여 명으로 늘어나자 그들은 하준규를 두령으로 일본에 항거하고 독립을 위해 결사 투쟁하는 보광당을 조직한다. 

본거지를 지리산 칠선계곡으로 옮긴 그들은 체포된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함양경찰서를 습격하면서 그 일대에 거창한 풍문과 신화와 민족적 희망을 남긴다. 보광당은 300여 명으로 늘어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들도 흡수된다. 그들 중에는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징역을 살던 이현상이 끼여 있어 해방과 함께 하준규 박태영 노동식 등 보광당의 주요 멤버들은 공산당원으로 포섭된다. 

해방을 맞아 이규는 하영근의 딸 윤희와 프랑스 유학을 떠나고 하준규는 함양에서, 노동식은 부산에서, 박태영은 서울에서 각기 좌익 계열의 건국운동에 참여한다. 경성대 철학과에 학적을 두고 공산당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노선을 변경하자 당의 상위자와 충돌, 당으로부터 제명 처분을 받는다. 

당의 명령에 의해 함양과 부산에서 봉기와 파업을 주도하던 하준규와 노동식은 해방 1년 만에 다시 경찰에 쫓겨 지리산으로 입산한다. 과거 보광당 단원이던 노동식 등을 거느리고 지리산 빨치산 대장이 된 하준규는 자신의 순수한 정열과 신념만을 믿고 이념과 행동에 충실하고자 하지만 당 중앙에서 파견한 정치위원들과 번번이 마찰을 일으킨다. 하준규는 지리산 유격대 대표자 자격으로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는 형식으로 평양으로 소환된다. 

복당 명령을 무시하고 개인적 좌익 활동을 하던 박태영은 과거의 전력이 드러나 체포되지만 6.25를 계기로 석방되어 북측의 통신 요원이 된다.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주에서 고립된 박태영은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지리산 빨치산들은 그들의 수뇌인 이현상 계열이 북으로부터 반역자들로 몰리고 휴전 협상에서는 거론도 안 된 채 붕괴되어 간다. 

박태영은 1954년 1월 하준규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예견했던 것처럼 ‘지리산의 마지막 빨치산’으로서 사살된다. 1956년 프랑스에서 귀국한 이규는 이 모든 비극적 종말들을 확인하게 된다. 

………………..

[지리산]의 등장인물 20여 명은 실존인물들이 모델이다. 박태영은 물론 그가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을 한사코 만류하던 애인 김숙자, 국내외 정세를 정확히 예견하던 허무주의자 권창혁, 하영근(본명 하영진), 하준규(본명 하준수), 주광중, 식민지 교육이지만 인간적이고자 애쓰던 일본인 교장 하라다, 교사 구사마가 모두 그러하다. 작가 자신은 ‘양지쪽으로만 걷는 인간, 위난이 저편에서 피해 가는 사람’ 이규에 해당한다. 

일본 동경에 유학했던 하준규와 박태영이 학병 입영을 거부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갈 결심을 하는 것이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져 가던 1943년 말이었다. 그 지리산은 그보다 5년 전 하라다 교장 이임식 석상에서 “저 지리산의 숭엄한 모습을 어느 해 어느 때 나와 함께 눈여겨 보았다는 기억을 너희들이 길이 간직해 주었으면 고맙겠다”며 학생들의자중자애를 당부하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산이기도 하다. 

첫번째 ‘지리산 가는 길’은 막연하기는 하지만 청년다운 낙관과 기대가 깔려 있는 낭만적인 길이다. 하준규 박태영 이규 노동식 등 학병 거부자들은 덕유산 괘관산 지리산으로 본거지를 옮겨가며 보광당을 조직하고 일제로부터 해방될 날을 꿈꾼다. 

해방 1년 만에 두 번째 ‘지리산 가는 길’은 희망보다는 과연 지리산으로 가면 살 길이 있을까’라는 회의를 안은 채 구체적인 위협에 쫓겨가는 우울한 길이며, 결국 그 길의 끝에는 배신과 좌절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의 역사는 실증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역사 속에서의 지리산은 만추의 쓸쓸함 따위와는 무관한, 무채색의 흑백사진처럼 삶과 죽음으로만 추상화된 공간일 뿐이다. 

진주에서 박태영 하준규의 고향인 함양까지는 60km, 함양에서 지리산 북쪽 기슭인 마천면까지는 30km이다. 일본경찰의 학병 거부자 수색대와 국군 공비토벌대의 주둔지였던 마천에서부터 칠선계곡까지는 아슬아슬한 산길을 따라 5km를 더 가야 한다. 길이 험해서 지프가 ‘택시’ 표지를 달고 운행하고 있는데 차는 출발하자마자 덜컹대면서 깊게 팬 계곡을 따라 뻗은 작은길을 조심스럽게 올라간다. 

4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추성리 본마을에서부터 지리산에서 가장 험한 칠선계곡이 시작된다. 칠선계곡은 일제 때 학병을 거부하고 입산한 하준규 박태영 등을 보호해 주었던, 험하기 때문에 안전할 수 있었던 곳이다. 지리산의 정상 천왕봉(해발 1,915m)과 중봉, 하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 거칠고 위험한 11km의 계곡을 이룬다. 

추성리 이장인 석덕완씨와 주민 권병호씨, 맹영석씨는 막걸리와 통조림 찌개를 같이 들면서 “하준수(소설의 하준규)는 체구는 작지만 무술이 뛰어나고 담도 크고 신출귀몰하는 사람이었으며 박태영에 대해 들은 적은 없지만 이곳 마천면 사람들도 몇 명이 ‘산사람’들에 가담했었다”고 들려 준다. 

‘산사람’들이 내려오면 밥도 해 주고 식량과 짚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식량 수송에 동원되어 얼어 죽을 뻔도 하고 공비들이 쏜 총에 맞을 뻔도 했다는 것, 공비들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집을 태우고 소개령을 내리곤 했기 때문에 이 동네 집들이 3,4번 불탔고 그로 인해 모든 집의 규모나 형태가 보잘것 없다는 것, 다시는 그런 싸움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 등이 그들이 들려 주는 얘기이다. 

‘절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심심산골의 유수함에 아득히 속세를 단절한 느낌으로 그윽한 곳’인 벽송사까지는 추성리에서 약 1km, 해발 460m인 벽송사로 오르는 길도 바윗길, 자갈길이다. 그 길 위에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이 쌓여 가을산은 적막하고 엄숙해 간다. 

벽송사는 일제 때 경찰에 체포된 학병 거부자 동지들을 구해내는 곳이며 빨치산 대장 하준규가 중학교 때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함양경찰서장와 협상을 벌이는 곳이다. 이 절 역시 보광전, 조사각만 제외하고는 당시 모두 불에 탔으나 전쟁이 끝난 후 작은 규모로 중수됐다. 당시의 승려들은 모두 환속해 버려서 옛일을 기억하는 승려들은 없다. 

벽송사에서 남쪽으로 눈을 들면 지리산의 연봉과 계곡의 윤곽들이 거대한 모습으로 펼쳐진다. 이념과 당의 노선에 회의를 갖고 절망하면서, 또한 자신의 경박한 이념 선택을 스스로 증오하면서도 빨치산의 길을 걷다가 사살된 하준규와 박태영의 고통스러운 삶의 흔적들은 이 지리산의 칠선골 뱀사골 피아골 칼바위골 거림골 백운골 등 모든 골짜기마다 스며 있다. 

또한 지리산에는 15년 만에 작품을 완성한 작가의 문학적 신념과 엄청난 자료 수집, 취재의 흔적들도 스며 있다. 작가는 [지리산]을 쓰기 위해 사진을 찍고 지도를 그리고 복사를 해서 완성한 83페이지짜리 자료집 ‘지리산’을 펴보이며 “[지리산]을 쓰기 위해 쏟은 노력이란 참…”하고 말을 하다가 만다. 그는 ‘[지리산]의 주제는 선동과 조정을 받아 그 많은 청년들이 공비라는 이름으로 죽어야 했던 데 대한 의분’이라고 소설의 후기에서 밝히고 있다.           <박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