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이현상을 만나기까지

이춘아 2022. 5. 28. 00:11

안재성, [이현상 평전], 실천문학사, 2010(2007 초판).

이현상을 만나기까지

이를 알고 있는 누군가 이현상의 일생을 쓰고자 했더라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줄곧 음지에서 이름을 감춘 채 활동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며 변변한 사진 한 장 남겨진 것이 없고, 절친한 벗들도 모두 죽어 증언할 사람이라곤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경악스러울 만큼 자료 정리가 되어 있지 않는데다 권력자들에 의해 고의적으로 왜곡되고 은폐되어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비밀이 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나 역시 처음부터 이현상을 연구하려 마음먹었던 건 아니었다. 지난 수년간, 노동운동사에 관심을 갖고 일제시대와 해방정국을 연구하면서, 이현상이란 이름을 수도 없이 만나야 했다. 하지만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따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절대 내놓지 않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고도 오명 속에 죽어간, 이제는 이름조차 잊혀진 무명의 혁명가들부터 되살리고 싶었다. 자신들을 이해하기는커녕 저주까지 퍼부어대는 그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그 평범한 사람들의 인간적 자존과 민족적 자존심을 위해, 오욕과 고통 속에 죽어간 혁명가들의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아주고 싶었다. 심지어는 북한에서조차 그 이름을 말하는 것이 죄악시되어버린, 역사의 미아들을 제자리에 복원해주고 싶었다. 이미 남한에 널리 이름이 알려졌고 북한에서도 영웅으로 등록되어 있는 이현상을 새삼스레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전혀 엉뚱한 이유 때문이었다.

해방된 지 삼 년 만인 1948년 10월 한반도의 남쪽 끝 여수와 순천에서 일어난 반란사건이 나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이 불의의 비극으로 수천 명의 죄 없는 양민이 살해 당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창 학교에 다니던 군사독재 시절의 국사 교과서에는 여순반란으로 수천 명의 양민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학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지만 나는 양민을 죽인 이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닐 것이라는 나름의 의혹을 갖고 있었다. 전쟁 기간 중 미군과 남한 군대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이 최소 수십만에 이른다는 사실은 오늘에 와서는 상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반세기 전의 진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적어도 제대로 된 기록은 남겨야겠다는 소박한 생각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여순반란의 진상은 이미 상당 부분 드러나 있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박종길, 이영일, 이오성 씨 등이 수년간 직접 돌아다니며 채록한 수많은 증언들은 너무도 상세하고 사실적이어서 끝없이 이어지는 참혹한 살상극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여수와 순천 일대에서 적어도 삼천 명 이상의 민간인이 남한의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사를 계속한다면 그 수가 칠천 명에 이르리라는 주장도 충분히 신빙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조사자료에는 또 다른 놀라운 사실도 올라와 있었다. 순천에서 반란군에 의해 살해된 숫자가 천이백 명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그 중 교전하다 죽은 경찰은 삼백 명을넘지 않았다. 나머지는 모두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좌익에 의해 무참히 학살된 사람들이었다. 일제시대부터 친일 경찰 노릇을 해온 민족반역자부터 해방 후 공산당 탄압에 앞장선 우익 청년단원들, 가난한 농민들의 원성을 사온 지역 유지 등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이후 벌어진 군경의 학살이야말로 이에 대한 보복의 성격이 강했다.

아득한 절벽을 만난 기분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반민족적인 패악을 저질렀다 해도, 혹은 개인적인 원한을 맺었다하더라도,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포로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무더기로 학살할 수 있다면 이것은 정의가 아니었다. 적어도 해방정국에서 그들이 정의를 실현하려 했다는 사실만은 인정했던 나로서는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사랑과 증오가, 정의와 불의가 동전의 양면이라면 대체 무엇을 진리라 말할 수 있을까? 지난 삼십 년간 진보운동을 위해 흘린 나의 땀과 눈물은 어떤 가치를 가지게 될 것인가? 도대체 누가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것일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순반란 관련 자료뿐 아니라 해방 후 사회주의운동에 관한 자료와 연구논문들, 그리고 회고록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답은커녕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여순반란 이전부터 시작된 지리산 일대 빨치산들에 대한 증언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군경에 의한 무자비한 주민 학살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으나 빨치산들에 의해 자행된 잔인한 살해 사건도 적지 않았다. 수적으로는 군경에 의한 학살이 압도적이고 잔혹했으나 빨치산들의 잔인함 역시 곳곳에서 증언되고 있었다. 무고한 피해자들의 넋을 위로하기위해 시작되었던 나의 작업은 점차 갈피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닥치는 대로 아무나 붙잡고 잃어버린 진실을 찾게 되었다. 여순반란은 마치 거대한 폭탄과도 같아서 폭파로 파인 구덩이보다도 후폭풍이 파괴한 면적이 훨씬 넓었다. 여순반란 당시 민간인으로서 인민위원회에 참여했던 할머니로부터 반란군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이들, 군경에 체포된 뒤 전향하여 옛 전우들을 잡으러 다녔던 할아버지까지,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만나러 다녔다. 서울과 인천부터 전남 여수와 구례, 경남 울산과 남해, 전북 무주와 충북 괴산까지 누비고 다녔다.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좌익에 의한 순천 학살에 대해 아예 언급을 꺼리거나 아니면 “우익들이 얼마나 악독하게 굴었기에 그토록 분노했겠느냐”고 변호했다. 들으나마나한 변명이었다. 해방 후 우익들의 잔인무도한 고문과 폭력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토록 많은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다면 보복 이상의 어떤 해명이 필요했다. 이래 가지고는 아무리 잘 쓴다 해도 좌우익 모두의 잘못이라는 양비론 아니면 불가피한 민족사의 비극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