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웃음과 침묵

이춘아 2022. 7. 10. 02:04

파커 파머, [다시 집으로 가는 길](김지수 옮김), 한언, 2014.

웃음과 침묵

침묵과 웃음은 잘 어울리지 않는 한 쌍 같다. 그러나 경험상 그들은 의외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예를 들어 몇 시간 침묵 속에 있어도 어색하거나 긴장감을 느끼지 않고, 더불어 고생스러운 시간을 헤쳐 나갈 때 농담까지 하는 두 사람을 무엇이라고 부를까? 물론 정답은 좋은 벗이다. 

침묵과 웃음은 우리를 무방비 상태로 만든다. 그래서 침묵과 웃음을 지탱하려면 좋은 벗이이어야 한다. 침묵이 우리를 무방비 상태로 만드는 이유는, 잡음 내는 걸 잠시 멈추면 순간 무슨 생각이나 감정이 튀어 올라올지 누가 장담하겠는가? 웃음이 우리를 무방비 상태로 만드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허물과 연약함에 대한 반응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농담 대상일 때 얼마나 바보스러워 보일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서로 믿는 사람들하고만 침묵과 웃음을 나눌 수 있다. 더 자주 나눌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 깊어진다. 

영혼은 침묵을 사랑한다. 침묵은 수줍은 영혼이 안전감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영혼은 웃음을 사랑한다. 영혼은 진실을 추구하고, 웃음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영혼은 생명을 사랑하며, 침묵과 웃음 모두 생명력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는 침묵과 웃음을 똑같이 편안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 벗 이상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바로 ‘영혼의 친구’라는 뜻인 소울메이트 말이다. 

난 늘 웃음이 넘쳤던 가정에서 자랐고, 우리 가족은 지금도 잘 웃는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은 남을 비웃는 것(나쁜 일)과, 사람들과 더불어 웃는 것(좋은 일)의 차이를 우리가 분간하도록 하셨다. 동정compassion은 문자적으로 ‘함께 감정을 느낀다’라는 뜻임을 알게 되었을 때 이 차이가 떠올랐다. 동정적 웃음은 비극과 희극의 씨줄과 날줄로 짜여진, 우리 모두가 다 함께 가지고 있는 인간적 상황을 볼 때 솟아난다. 상대방과 더불어 웃는다는 건 동정의 한 형태이며, 신뢰 서클에서 돌아다니는 웃음이다. 

두 가지 웃음에 대한 우리 부모님의 훈계의 대칭점은 침묵에도 있다. 우리는 사람들에 ‘대해’ 침묵할 수 있다. 우리의 경멸을 전달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침묵 처방’을 내릴 때도 있고, 다른 이에게 부조리가 자행되는 걸 볼 때 겁쟁이의 침묵을 가질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침묵은 공동체를 망가뜨리고, 우리를 악의 공범자 자리에 세우기까지 한다. 

또는 사람들과 ‘더불어’ 침묵할 수 있다. 사색과 깊이 생각하기와 기도를 에워싸는 침묵. 우리가 신뢰 서클에서 행하는 침묵이 바로 이것이다. 이 더불어 하는 침묵은 인간이 교제하는 행위의 또 다른 형태다. 이런 동정적 침묵은 상대방과 서로 이어지면서 맞닿는 데 도움이 된다. 동정적 침묵으로 인해 우리는 어떤 말로도 다다를 수 없는 진실에 손을 대고, 또 한 진실이 우리에게 손을 댄다. 

내가 11년간 살면서 일했던 공동체인 펜들힐에서 우리의 삶은 너무 서로 얽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금세 정이 들었고, 그만큼 금세 소외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소외되었다는 것은 거기 살았던 한 여자에 대해 내가 말하려는 바를 완곡히 표현한 것이다. 그녀는 지상의 모든 생명에서 풋풋함과 좋은 것을 파괴하기 위해 지옥의 구덩이에서 직접 파송된 악마의 자식처럼 보였다. 

펜들힐에 사는 사람들은 아침마다 ‘예배 모임’에 참석한다. 45분간 집단적 침묵 시간을 가지는데, 간혹 마음으로부터 절로 샘솟는 말이 있으면 침묵을 깨고 말한다. 어느 날 아침 예배 시간에 늦게 들어갔는데, 남은 자리는 그녀의 옆자리뿐이었다. 순간 짜증이 솟구쳐 돌아 나오려고 했으나, 어쩌다가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 나는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했다. 그리곤 어둠이 세계에서 온 생명체 옆에 앉아 있음을 서서히 잊어버렸다. 

30분 남짓 후 다들 머리를 숙이고 있는데, 난 눈을 뜨고 그 여자의 손이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무릎 위에 포개져 있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 한 줄기가 그 손 위를 비췄고, 희미하지만 꾸준히 맥박치는 동맥이, 그녀의 아주 인간적인 심장의 원초적 박동이 보였다. 그 순간 여기 있는 사람이 나와 똑같이 강점과 약점을 지녔음을 언어를 넘어 깨달았고, 그녀가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에 대한 내 느낌은 어떤 종류의 근본적 변화를 겪었다. 

난 그 뒤로도 이 여자와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자면 난 그녀에 대한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의 햇살이 내리쬐던 순간부터는 더 이상 그녀를 악마처럼 볼 수 없었다. 그녀의 사람됨에 대한 이 계시와 우리 관계에 대한 재설정은, 내가 그녀와 ‘말로 풀려고’ 했다면 도저히 달성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된다. 침묵 속에는 우리가 언어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을 무색케 하는 깊음의 교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