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
이춘아
2022. 7. 23. 05:48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 탓도 있지만,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버릇 때문일 겁니다. 인도로 가기 전에도 산에서 수년 동안 독거한 적이 있고, 인도에서나 지금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혼자 있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학교 강의가 있거나 별다른 일이 없다면 나는 거의 혼자 내 방에 앉아 있는 편입니다. 혼자 있게 되면 생각이 깊어집니다. 나를 지켜보고 나의 사념을 응시하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이 강의는 나 혼자의 생각을 여러분에게 던져보는 시간입니다. 나의 고백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강의는 오히려 나 자신에게 의미가 깊은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내 생각을 여러분에게 던져보고,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반응이 돌아오는가를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마치 스님들이 선방에서 참선을 하다가 어느 때가 되면 선지식을 뵙고 자기의 공부를 점검받듯이, 나는 여러분에게 강의하러 온 게 아니고 몰래 혼자 한 내 생각들을 점검해 보러 온 것입니다. 혼자의 생각은 자칫 독단으로 흘러버릴 가능성이 있거든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 강의는 ‘인도의 철학과 문화’라는 이름의 교양강좌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교양이나 상식을 전하자는 게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틀에 박힌 교양인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에너지가 충만한 원시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교양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맹점을 안고 있습니다. 문명은 자칫 나른해지기 쉬운 법이거든요.
정상적인 사람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일탈을 꿈꾸는 괴짜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는 창조적인 괴짜들이 드물다는 겁니다. 우리 사회의 교육 자체가 틀을 깨고 나가기 어렵게 만듭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붕어빵처럼 틀에 박힌 모범생들을 양산하고 있지요. 그래가지고는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일상은 일탈을 위하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인도 이야기를 할 겁니다. 그러나 인도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인도사상은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자신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내 주변 사람들이 그럽니다. “지겹지도 않느냐, 아직도 인도냐?”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인도사상은 먼 나라 사람들의 오래 전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통하여 사람들이 고민해 온 문제는 고대사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철학적인 모든 물음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내면으로의 침잠은 곧 우주로의 확산입니다. 칠판이라는 평면에 표현되는 침잠과 확산은 서로 역방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지만, 내면의 세계에서는 침잠이 곧 확산일 수 있습니다. 그 둘은 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인도사상에서는 이러한 체험의 절정을 흔히 범아일여라고 합니다. 대우주와 소우주가 하나라는 체험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와 같은 물음들은 대답이 없어도 좋은 질문, 결론이 없어도 좋은 논의라 할 수 있습니다. 과정이 중요해요. 묻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를 지닙니다. 철학이라는 게 그렇고 종교라는 게 그렇습니다. 그건 끝점보다는 과정이 중요한 영역입니다. 끝점에 집착하면 되레 왜곡되기 쉬운 영역이기도 합니다. 묻는 행위자체가 철학이고, 사는 것 자체가 종교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디엔가 닿아 있습니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그러나 우연은 그냥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연은 묻고 또 묻는 사람에게 그야말로 우연히 일어납니다. 준비한 사람에게만 의미 있는 우연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에 대해 묻고 또 묻다보면, 문득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강의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관념의 파괴’라고나 할까요?
중요한 것은 느낌입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대했을 때, 다만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장면을 어떻게 해야 멋진 시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떤 앵글로 잡아야 괜찮은 사진이 될까’를 생각하는 순간 이미 그 아름다움은 생명을 상실합니다. 살아 펄떡이는 생선은 없고 죽은 고기만 남습니다. 어떤 경우든 생각은 ‘지금 여기’와 무관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과거와 이어져 있거나 아니면 미래와 연결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오직 느낌만이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느낌에 충실할 때 늘 새로울 수 있으며, 늘 처음일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최초는 최고와 통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노트는 이미 생명을 상실한 것입니다. 나와 여러분이 일직선으로 만나는 이 상황은 여러분의 노트 속에 없습니다. 나와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 상호간에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교감은 노트에 기록될 수 없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느낌입니다. 나와 여러분이 만나는 지금 여기의 콘텍스트가 중요합니다. 물론 노트가 잊어버린 기억을 일깨우기 위한 단서로 사용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우리의 내적인 성장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관념의 틀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