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아 2022. 8. 13. 02:23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이지수 번역), 바다출판사, 2021.

손도끼

키키 키린 씨와의 작업은 [태풍이 지나가고]로 영화는 다섯 번째다. 

처음 뵌 것은 2007년, [걸어도 걸어도] 각본을 완성한 후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모습을 겹쳐 만든 주인공의 어머니 요코야마 도시코 역을 맡아줄 분은 키린 씨분이라고 마음을 정하고 연락드렸다.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함께 연기하며 울린 배우도 여럿이라 한다. 그런 말들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인지 아마 나를 포함한 스태프 모두 긴장하고 있었던 것같다. 

“날씨가 좋아서 걸어왔어” 하며 엔진필름 회의실로 들어 온 키린 씨는 맛있어 보이는 걸 길거리에서 팔고 있었다며 가방에서 바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내 기억으로는 고구마말랭이였지만 키린 씨가 바나나였다고 단언하시니 이 부분은 키린 씨의 기억을 존중하기로 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엔진필름의 야스다 회장, 프로듀서 가토 씨, 그리고 나의 얼굴을 둘러보며 한마디. 

“촬영은 아직 멀었는데 이렇게 빨리 불렀다는 건, 내가 좀 성가시다는 소문이 그쪽에 퍼진 거야?”

이렇게 말하며 히쭉 웃었다. 

“아뇨. 그렇지는 않은데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묻지도 않았는데 이 역할의 중요성 따위를 횡설수설 늘어놓기 시작했다. 키린 씨는 그런 모습을 즐겁다는 듯 바라보았다. 만난 지 1분 만에 완전히 키린 씨의 페이스에 휘말려버렸다. 

10년 가까이 만나 뵈며 이미 익숙해졌고, 요즘은 오히려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는 듯한 강렬한 한 방을 먹이는 키린 씨가 기대마저 되지만 당하는 쪽은 큰일이다. 

어느 파티에서의 일이다. TV 업계의 높으신 분이 “옛날에 키린 씨가 나온 00라는 드라마를 제가 연출했어요” 하며 일부러 키린 씨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아, 그땐 신세를 졌네요”라는 식의 사교성 멘트는 일절없이, 그가 내민 명함의 이름과 얼굴을 번갈아 비교해보며 “기억 안 나는데, 내가 정말 나왔어?”라고 한마디. 싹둑 잘라버리고 끝났다. 

또 다른 시상식에서의 일. 이때도 인사하러 온 중역이 하는, 솔직히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를 잠시 들은 뒤 갑자기 “당시, 그 넥타이 어디서 샀어?” 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실례야”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는 일이, 어째서 키린 씨가 하면 오히려 웃어넘기거나 당한 쪽이 화젯거리 삼아 나중에 남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소중한 에피소드가 되는 걸까. 

그건 아마 키린 씨의 태도와 말 속에는 사람의, 그리고 만사의 ‘본질’을 꿰뚫는 날카로운 나이프가, 아니 손도끼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종종 키린 씨의 가식 없는 직언을 ‘독설’이나 ‘폭언’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프로 기자나 리포터 중에도 있지만 그건 다르다. 키린 씨는 결코 등 뒤에서 칼을 꽂지 않는다. 상대의 정면에서 손을 높이 쳐들어 손도끼를 내리찍는다. 그 정정당당한 모습은 상쾌함마저 풍긴다. 

물론 상대가 눈앞에서 사라진 순간 “있잖아” 하며 옆에 앉은 내 팔꿈치 셔츠 부분을 움켜쥐고는 “저 사람의 xx는 분명 00겠지” 하고, 누구에게나 신경은 쓰이지만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말을 하며 함께 웃는, 그야말로 내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보통 사람’ 그 자체인 키린 씨도 너무 좋고 즐겁다. 

그러나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건 촬영 현장에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빨리 혼자 운전하고 와서 대기실에서 대본을 무릎 위에 펼쳐둔 채 눈을 감고 홀로 대사를 연습하는 키린 씨다. 

그리고 현장에 들어갔을 때, 가령 그곳이 단지 내 아파트의 부엌 식탁이라면 거기서 그 어머니가 40년 동안 생활한 시간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의자 위치는 진짜 여기인가? 냉장고와의 거리는 적당한가? 커피포트는 안 보고도 잡을 수 있는가? 그 어머니는 여기 앉기 전에 어디서 무엇을 했나? 하며 자신의 몸과 공간의 모든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해 파악하려는 그 키린 씨다. 

키린 씨가 까다롭게 대하거나 그 결과대로 울려버리는 상대는 아마 키린 씨와 같은 태도로(레벨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역할과 작품, 그리고 키린 씨를 마주하려 하지 않고 애매하게 도망가는 자세를 보인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상상한다. 그만큼 현장에서 키린 씨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수명을 줄여가며 자신과 자기 능력의 한계를 마주한다. 

그때 키린 씨가 가진 손도끼는 자기 자신 위로 들려 있다. 남을 향한 엄격함보다 더한 엄격함으로, 그는 본인을 지적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은 정말로 아름답다. 성스럽기까지 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각오를 목격한 나는 이런 배우와 함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가, 그렇게 마음속 깊이 생각한다.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