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영화를 하고 있기에

이춘아 2022. 8. 14. 00:54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이지수 번역), 바다출판사, 2021.

“영화를 하고 있기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정성일 평론가의 대화는 2021년 6월 18일 경복궁 근처 어느 한옥 카페에서 진행되었다. 고레에다 감독은 영화 [브로커] 막바지 촬영 중이었음에도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었고, 정성일 평론가의 질문에 마음을 다해 답변해 주었다. 그날 오전에 비가 내렸고, 두 사람이 약 네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질 때는 말끔히 개었다.  -편집자

정성일: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특별히 훌륭하다고 생각하시는 지점은 어디이지요? 그리고 그중에서도 [밀양]이 훌륭하다고 말하셨는데 [밀양]의 무엇이 감독님의 마음을 움직였는지요? ‘한 사람의 감독으로서 나는 이창동 감독의 이 점들이 특별하게 내 마음을 움직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고레에다: (잠시 생각) [밀양]이라는 작품은 정말 잔인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잔인함에 대해 그리는 영화예요. 그 주인공에게 찾아오는 비극은 언제든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잔인함은 아이를 잃은 슬픔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어요. 이 영화가 정말 무시무시하다고 느꼈던 건 아이를 살해당한 엄마가 몸부림치면서 구원을 찾아 헤매다가 그 끝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장면에서였습니다. 주인공이 자신의 아이를 유괴하고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려고 형무소에 가잖아요. 거기서 범인으로부터 이미 자신은 신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얘기를 듣게 되죠. 이토록 끔찍한 잔인함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마침내 주인공이 도달한 곳, 감당하기 힘든 경험들을 승화하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찾아가게 된 곳에서, 그게 신인데…. 그 신에게서조차 배신을 당하는 거잖아요. 그즈음부터 정말 잔인한 감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인간에 대한 통찰이 깊은 거겠죠. 이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는 압도적으로 훌륭하지만, 그에 더해 감독이 내미는 질문들, 신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구원에 대한 감독의 철학적인 사고들이 일관되게 작품 전체를 뚫고 가고 있어요. 끝까지 그 질문을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실로 깊고 날카롭다고 느꼈습니다. 

사실은 [밀양]의 그 훌륭함, 대단함에 대해 얼마 전 송강호 씨와 개인적으로 이야기 나누면서 직접 전할 기회가 있었어요. 무엇이 이 영화의 대단함인가 했을 때, 영화에서 송강호 씨는 속물로서 철저히 가볍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영화가 짊어지고 있는 무게나 철학적인 질문을 무겁지 않게 우리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이 영화를 보면 송강호 씨가 맡은 인물이 주인공 여자를 따라다니고 그 주변을 얼씬대고, “당신은 그 여자의 타입이 아니”라는 얘기를 들으면서까지도 끝까지 그 여자 곁에 머물게 되잖아요. 그러다가 범인의 딸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다니는 미용실에 여자 주인공을 데려가고요. 여자는 거기서 도망가려고 하는데, 그때 송강호 씨가 했던 일련의 행동들에서 어떤 신의 손길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저 속물적이고 가볍게 보였던 그의 행동들이 결과적으로 여자를 구원으로 이끄는 모습을 봤을 때, 이 ‘밀양 secret sunshine’ 이라는 제목 그자체를 구현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송강호 씨의 역할이었구나, 라고 느끼게 되었어요. 어떻게 보면 사람이 살면서 놓치기 쉬운, 깨닫지 못하는 소중한 것이, 하찮게 여겼던 대상 속에서 불현듯 나타날 수 있다는 가치관이나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성일: 감독님을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제 교실의 학생들이 감독님에게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 모여 스스로 힘을 얻기 위해 했던 말, 그 말이 무엇인지를 자신들에게 나눠주면 힘든 순간이 왔을 때 자신들도 그 말을 부적처럼 쓰고 싶다, 라는 간절한 부탁을 받았습니다. 

고레에다: 기본적으로 힘들지 않아요. 찍고 있을 때는 힘들지 않습니다. 찍고 있지 않을 때는 힘들 때도 있지만요. 시나리오를 쓸 때나 편집할 때나 현장에서 영화 찍을 때나 진짜로 재미있었어요. 물론 힘든 순간이 있었을 텐데, 돌이켜봤을 때 내가 괴로웠던 순간이 언제였는지가 생각이 안 날 만큼, 반대로 말하면 이 일을 하고 있기에 정말 다행이다 싶어요. 데뷔 때부터 작품을 함께한 야스다 마사히로라는 프로듀서가 계세요. 영화라는 게 흥행에 성공할 때도 있고 망할 때도 있고 하잖아요. 기본적으로는 망하는 경우가 더 많죠. 그런데 그럴 때마다 이분은 슬쩍 와서 위로를 해주셨어요. “나는 좋았어’라고요…. 이분은 상업광고를 제작하는 회사를 경영하셨는데, “네가 낸 적자 정도는 내가 금방 회수할 수 있어. 걱정하지마. 다음에 또 같이하지.” 이런 구체적인 위로를 해주셨던 분이예요. 근데 2009년에 돌아가셨고, 그전까지는 이분을 의지하면서 제가 영화를 만들었던 터라 돌아가신뒤에 그동안의 제작 방식을 중단해야만 했던 상황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이제 영화를 떠나야 하나’하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마 그때가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홀로서기를 하는 타이밍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적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나, 늦었지만 그런 시기였을 겁니다. 40대 중반을 지나고 있었고요. 그 후로는 어떤 상황이어도 ‘우는 소리나 약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지’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하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아이들이 촬영 현장에 있잖아요. 그러면 저는 정말 즐기고 있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이건 조금 교육적인 관점이기도 한데, 아이들 입장에서는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 외에 사회에서 처음 마주치는 어른이잖아요. 그런데 그 어른이 뭔가 진지하게 하고 있는데 무척 즐거워 보인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전혀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고, 내가 여기서 ‘우는 소리를 하거나 약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지’라는 마음가짐은 항상 가지고 있는 거 같습니다. 진짜로 제가 영화를 찍고 있는 동안에는 힘들다고 느낀 상황들이 없었어요. 찍지 못하게 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