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몸과 총과 입으로 지금도 말하고 있다

이춘아 2022. 8. 20. 00:13

김훈, [하얼빈], 문학동네, 2022.

(166~167쪽)
안중근은 러시아 군인들 틈새로 조준선을 열었다. 이토의 주변에서 키 큰 러시아인들이 서성거려서 표적은 가려졌다. 러시아인과 일본인들 틈에 섞여서 이토는 이동하고 있었다. 이토는 가물거렸다. 

안중근의 귀에는 더이상 주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시, 러시아인들 틈새로 이토가 보였다. 이토는 조준선 위에 올라와 있었다.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가 방아쇠를 직후방으로 당겼다. 손가락은 저절로 움직였다. 

총의 반동을 손아귀로 제어하면서 다시 쏘고, 또 쏠 때, 안중근은 이토의 몸에 확실히 박히는 실탄의 추진력을 느꼈다. 가늠쇠 너머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이토의 모습이 꿈속처럼 보였다. 하얼빈역은 적막했다. 

탄창에 네 발이 남았을 때, 안중근은 적막에서 깨어났다.  …… 나는 이토를 본 적이 없다 ……… 저것이 이토가 아닐 수도 있다……

안중근은 다시 조준했다. 안중근은 고요히 집중했다. 손바닥에 총의 반동이 가득찰 때 안중근은 총알이 총구를 떠난 것을 알았다. 이토 주변에 서 있던 일본인 세 명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러시아 헌병들이 안중근을 몸으로 덮쳤다. 안중근은 외쳤다. 

코레아 후라

 안중근은 쓰러지면서 총을 떨어뜨렸다. 탄창 안에 쏘지 못한 한 발이 남아 있었다. 러시아 헌병들이 안중근의 몸을 무릎으로 눌렀다. 안중근은 하얼빈역 철도 가에서 묶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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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307쪽: 작가의 말)
한국의 근대는 문명개화의 꿈에 매혹되었고 제국주의의 폭력에 짓밟혔다. 이 문명개화는 곧 서구화였고, 한국인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이미 이룩한 문명은 개화의 추동력에 합류할 수 없었다. 20세기 초의 한반도에서 과거는 미래를 감당할 힘을 상실했고 억압과 수탈을 위장한 문명개화는 약육강식의 쓰나미로 다가왔다.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의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서 있었다. 그의 대의는 ‘동양 평화’였고, 그가 확보한 물리력은 권총 한 자루였다. 실탄 일곱 발이 쟁여진 탄창 한 개, 그리고 ‘강제로 빌린(혹은 빼앗은)’ 여비 백 루불이 전부였다. 그때 그는 서른한 살의 청춘이었다.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소설로 써보려는 것은 내 고단한 청춘의 소망이었다. 나는 밥벌이를 하는 틈틈이 자료와 기록들을 찾아보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의 족적을 찾아서 일본의 여러 곳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그 원고를 시작도 하지 못한 채 늙었다. 나는 안중근의 짧은 생애가 뿜어내는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했고, 그 일을 잊어버리려고 애쓰면서 세월을 보냈다. 변명하자면, 게으름을 부린 것이 아니라 엄두가 나지 않아서 뭉개고 있었다. 

2021년에 나는 몸이 아팠고, 2022년 봄에 회복되었다. 몸을 추스르고 나서, 나는 여생의 시간을 생각했다. 더이상 미루어 둘 수가 없다는 절박함이 벼락처럼 나를 때렸다. 나는 바로 시작했다. 

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 그의 몸은 대의와 가난을 합쳐서 적의 정면으로 향했던 것인데, 그의 대의는 후세의 필생이 힘주어 말하지 않더라도 그가 몸과 총과 입으로 이미 다 말했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을 쓰면서 여러 서물書物들에 의지했다. 이미 연구되고 기록된 사실들의 바탕 위에서 등장인물의 내면을 구성하고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애썼다. 인용하거나 참고한 서물 중에서 중복되거나 어긋나는 대목들은 소상히 밝히지 못했다. 

안중근 사건의 신문과 공판 기록은 소설적 재구성을 용압하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긴장되어 있다. 그 짧은 문답 속에서는 고압 전류가 흐르고 있고, 그 시대 전체에 맞서는 에너지가 장전되어 있다. 이런 대목들은 기록의 원형을 살려나갔다. 조도선(1879~1928), 유동하(1892~1918)는 안중근의 조력자로 하얼빈에 동행했었고, 재판에서도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안중근 거사와 직접 관련성이 낮다고 생각해서 소설의 구성에서 제외하였다. 

안중근을 그의 시대 안에 가두어놓을 수는 없다. ‘무직’이며 ‘포수’인 안중근은 약육강식하는 인간세의 운명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 안중근은 말하고 또 말한다. 안중근의 총은 그의 말과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