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한 명
선판, [홍위병](이상원 옮김), 황소자리, 2004.
선판(1954~ ), 베이징 출생.
머리말
나는 이민1세대로 긍지를 안고 사는 미국인이다. 대학원생 신분으로 처음 미국 땅을 밟은 1985년 1월, 내 수중에 가진 돈이라고는 단돈 100달러가 전부였지만 꿈은 원대했다. 나는 열심히 공부해 장학금을 탔고 각종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었다. 또 제도교육이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틈나는 대로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나는 미국이 좋았고 그 사회를 좀 더 잘 알고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법정에도 들어가 보았으며 농장과 주 교도소, 텔레비전 방송국이나 신문사 등을 견학했고 양로원에서 자원봉사도 했다.
일년 반 만에 석사를, 5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미네소타 남부의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며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한밤중에 놀라 깨는 일이 종종 있다. 고통스러웠던 과거, 투쟁과 절망으로 점철되었지만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던, 그리하여 결국 자유의 땅에 정착하게끔 했던 그 세월이 생생히 떠오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비밀을 비로소 털어놓겠다고 결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선 부모님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리라는 걱정이 컸다. 평생 혁명가로 살았던 두 분은 아들인 내가 혁명에 크나큰 죄를 저질렀다는 데 대해 분노하고 상처받을실 것이 뻔했다. 나 같은 자식은 아예 낳지 않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하시게 될 수도 있었다. 부모님의 사상 교육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위대한 지도자인 마오쩌둥(1893~1976) 주석에 반기를 들고 혁명 반대론자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내 ‘배신행위’는 부모님에게 참기 어려운 고통과 치욕으로 남을 것이다. 두 분은 혁명가의 집안에서 나고 자란 만큼 나 역시 완벽한 혁명가로 성장하리라 확신하셨다.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모두 청왕조와 외세에 저항한 혁명가였다. 부모님도 일본과 국민당에 맞서 싸우는 공산 혁명가의 삶을 사셨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당신들의 아들이 혁명 전사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셨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직후 결혼하셨던 두 분은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화 앞에서, 결혼식 하객들 앞에서 자녀들이 모두 마오쩌둥의 뒤를 따르게 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리고 첫 아이의 이름은 혁명가에 걸맞은 ‘판’자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내 이름이 선판이 된 것이다. 그 이름은 ‘수백만 노동자 중 평범한 한 명’을 의미했다. 혁명가는 반드시 노동자 출신이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나는 베이징 서쪽 끝, 인민해방국 사령부가 위치한 다위안에서 자랐고 세 살 때 공산당원 자녀를 위한 엘리트 기숙학교였던 페이트 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나는 혁명가에게 요구되는 사상을 익히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위대한 지도자를 사랑하고 공산주의를 숭상하며 자본주의를 증오하도록 가르쳤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늘 혁명 노래를 불렀다. 어릴 때부터 나는 부지런히 공부하는 모범생이었고 선동적인 글짓기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내가 2학년 때 쓴 혁명을 찬양하는 글을 본 부모님과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친구들 앞에서 내 글을 낭독하셨고 어머니는 내가 틀림없이 공산당 고위 당원이 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런 글짓기 재능에도, 선생님과 부모님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혁명의 꽃을 화려하게 피워내는 나무가 되지 못했다. 교조적 학습이 오래 지속되면서 무언가 잘못되고 만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사악한 힘’이 내 정신을 파고들었고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힘은 위대한 지도자의 말씀보다 훨씬 강력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악한 힘’의 정체를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개인적인 야심’이었다. 자아비판 시간에 가장 무섭게 비난 받는 대상, 혁명가에게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금지된 생각이었다.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진정한 혁명가가 견지해야 할 모든 사상과 정반대이기 때문에 가장 위험하다고 했다. 진정한 혁명가라면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이타적인 자세로 당과 위대한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악한 힘’ 앞에서 무력했다. 인생에서 성공하고 싶었다. 결국 나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속이면서 완벽한 꼬마 혁명가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지도자를 위해 내 생명을 바치고 이름없는 혁명의 병사가 되겠다는 구호를 목청껏 외쳤지만 정말로 그렇게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한술 더 떠 나는 그 혁명 구호를 개인적 성공을 위해 교묘히 이용하기까지 했다. 결국 나는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에도 저항했던 셈이다. 나는 수백만 노동자 중 평범한 한 명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위대한 지도자와 당이 내게 정해주는 운명도 받아들이기 싫었다. 물론 그런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나’라는 개인의 차원에서 사고하자면 철저한 비밀 유지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 책 집필을 망설였던 데는 부모님이 느끼게 될 실망감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문화혁명 시기 동안 나 자신이 저지른 짓을 떠올리면 스스로 너무도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그 수치스러움은 남몰래 개인적인 야망을 추구했다는 점 때문이 아니다. 꼬마 혁명가 노릇을 하면서 나는 온갖 잔인한 파괴 활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독자들은 앞으로 서술될 그 행동들을 보면서 분명 충격을 받으리라. 당시 나는 적에 대한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잔인하지 않다는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지만 돌이켜보면 스스로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이는 내 일생에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상처로 남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혹시라도 이 책이 중국에 남아 있는 내 가족과 친구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순전히 내 개인의 삶을 써내려간 것이다. 과거의 역사나 오늘날의 중국 상황을 평가하려는 의도 따위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걱정을 떨칠 수 없었고, 그래서 일부 등장 인물에 대해서는 실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분명히 밝히건대 내가 혁명 반대론자가 되어버린 것은 그 누구의 영향도 없는 독자적인 결정이었다. 부모님이나 친구들, 선생님들은 이와 전적으로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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